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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아버지에 대한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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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 19-06-03 18:21 조회 2,252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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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대학으로부터 입학허가서를 받고 비자와 항공권까지 일사천리로 준비를 마친 후 출국 일을 불과 한 달 앞두고 아버지에게 독대를 청했다. “독일로 가서 공부를 하고 싶다.”고 이제 막 유학에의 뜻을 품고 아버지의 동의를 여쭙는 분위기를 연출했지만 실상은 이미 모든 것이 결정되었음을 알리는 하나의 ‘통보’였다.

내가 거사를 계획하고 있는 동안 아버지는 스무살 중반의 딸을 위해 그 나름대로의 설계를 하고 계셨다. 대학 졸업 후 직장생활 1,2년 정도 하면서 사회라는 것도 살짝 배우고 나면 착하고 생활력 있는 남편감 골라 시집을 보내겠다는 지극히 평범한 것이었다. 사실 이 설계는 모순적이었다. 아버지는 한 때 나를 군대에 보내어 여군을 만들고 싶어 하셨으니까.

노선이 달라도 너무 다른 아버지와 나의 갈등은 나의 유학선언을 기해 극에 달하고 말았다. 창백한 얼굴의 아버지가 마지막으로 내게 하신 말씀은, “아예 호적을 파서 떠나거라.”였다. 이후 아버지는 며칠을 고심하셨는지 결국 식사한 것이 체하고 응급실로 실려 가는 상황으로 발전했다. 단순한 체증이 아니라 앓고 계시던 고혈압이 악화되어 혼수상태로 3일간 응급실 신세를 져야했다.

1979년 박정희 전 대통령 서거 소식에 충격으로 쓰러지셨던 것이 후유증으로 남아있었지만 기본적으로 건강한 체질이셨다. 그래서 우리 가족 모두는 곧 깨어나실 거라는 확신을 가지고 지켜보고 있었지만 의사들은 최악의 상황까지 계산하라고 경고했다.

출국일이 다가오는 상황에서 아버지의 병실에 앉아 나는 어쩔 수 없는 결단을 내려야했다. “포기는 말자. 그냥 쉬어가자......” 다행히도 아버지는 3일 만에 깨어나셨다. 의사들은 자기들 의사생활 하는 동안 아버지처럼 정신력 강한 환자는 처음 본다고 놀라워했다. 긴 잠에서 깨어나신 아버지는 세 시간 정도 자고 일어난 기분이라고 낮은 소리로 말하시며 그 세 시간 동안 꾼 꿈 이야기를 하셨다.

아버지는 온통 검정색으로 둘러싸인 길고 긴 터널의 끝을 향해 마구 달려가고 있었다. 터널의 끄트머리쯤에서 아버지의 할아버지(우정 임규)께서 순백의 도포차림으로 손짓을 하시며 “익순아, 어서 오너라. 나하고 갈 곳이 있어.” 하시더란다. 꿈에서도 그리웠던 할아버지를 만난 아버지는 말할 수 없는 반가움에 할아버지를 향해 전력질주를 하다가 몇 미터쯤 남겨두고 달음질을 멈췄다. 아직 마무리 하지 못한 일이 갑자기 생각나서였다. “할아버지, 제가 하던 일이 있는데 끝내놓고 할아버지께로 다시 가겠습니다!,”라고 말하고 달려가던 길을 뒤돌아 터널을 빠져 나왔다. ‘터널꿈’이 아버지가 3일 동안 혼수상태에서 꾼 꿈의 내용이었다. 나는 지금도 아버지의 꿈이야기가 생생하다. 마치 내가 직접 꾼 꿈이라도 되는 듯.

예정했던 출국날짜에 맞추지는 못했지만 나는 한 학기 늦춰서 독일행을 감행했고 아버지도 더 이상은 나를 주저앉히지는 못하셨다. 외국에서 혼자 살아간다는 게 상상 이상으로 힘든 일이라는 것을 직접 체험해보면 일 년도 못 되서 집으로 돌아올 거라고 계산하셨던 듯하다. 그런데 나의 독일생활은 그토록 목 말라하던 ‘독립’을 성취하게 해주었기에 25년이 지난 지금까지 집으로 돌아가는 일이 쉽게 일어나지 않고 있다. 아버지가 나의 독일행을 진정으로 이해해 주신 것은 장학금 소식을 전해드리고 나서부터였다. 그저 폼이나 잡아보자고 떠난 유학이 아니라는 것을 인정하신 것이었다.

내가 독일에서 정착을 하고 있는 동안 아버지는 편지를 가끔 보내주셨다. 평소 말로는 표현하지 않으셨던 깊은 속사랑이 가득 담긴 내용들이었다. 지식을 얻는 일도 중요하지만 독일인들의 삶의 지혜와 검소함을 배우라고 늘 강조하셨다. 철없던 어린 시절에는 그저 ‘잔소리’로만 들리던 말들이 나도 모르는 사이 위대한 ‘가르침’으로 내 속에 깊숙이 자리 잡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나는 여전히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아버지의 그늘 안에서 살고 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아버지가 남기신 회고록을 정리하면서 한 사람의 위대한 인간을 만났다. 그 위대한 인간이 나의 아버지라는 사실이 자랑스럽고 감격스럽다. 아버지 생전에 이런 존경심을 표현하지 못했음에 죄송할 뿐이다. 아버지는 1917년에 태어나 1997년까지 80년 생애에 대한민국의 파란만장한 역사를 온 몸으로 겪으면서도 정체성을 잃지 않고 그 안에서 자신의 역할을 충실하게 수행해낸 진정한 군인이었다.

지나치리만치 꼼꼼한 성격의 아버지는 평소 메모를 열심히 하셨기 때문에 과거의 일들을 이렇듯 생생하게 기록으로 남길 수 있었을 것이다. 자신이 살아온 생을 원고지에 모두 옮기신 후 나에게 지시하셨다. “이건 네 아버지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 자식들에게 들려주고 싶어서 정리한 거다. 몇 부 복사해서 형제들에게 나누어 주거라.”

무게만 5킬로그램에 달하는 친필원고는 25년 전에 완성되었지만 한 권의 책으로 묶이게 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나의 생활 가운데 해야 할 일에서 늘 순위가 밀리면서 오늘에까지 오게 되었지만 올해는 정전 60주년이 되는 해로서 아버지를 기리고자 하는 의미로 책을 발간하게 되었다. 60년 전 6.25전쟁이 휴전되고 1953년 8월 21일 37일 간의 전쟁포로의 신분에서 풀려나 대한민국으로 송환된 아버지에게 새로운 시련이 시작된 때이기도 하다.

이 책에서 이야기하는 사실들은 우리가 지금까지 모르고 있었던 소중한 역사의 일부이기도 하다. 그저 한 개인의 혹은 한 군인의 이야기에 불과한 것이 아닌 그 이상의 이야기로 역사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는 판단과 아버지의 시대에 비해 모든 것이 풍요로운 환경에서 살고 있지만 불만이 더 많은 이 시대의 우리에게 들려주고 마음에서 ‘아버지의 이야기’를 세상에 내놓는다.

2013년 6월 독일 아샤펜부르크에서 임진

2. 군인다운 군인

임익순 대령과의 첫 만남은 1949년 안동 25연대에서였다. 당시 대전 사단본부에 있던 임 대령이 공비토벌 작전의 임무를 띠고 우리 부대로 급파되면서였다. 제주도 4.3사건을 일으킨 공비의 잔존세력이 태백산맥 지역에 은신 하면서 게릴라작전을 펼치고 있었던 때다. 그와 나는 대대장과 중대장으로 만났지만 작전수행이나 일상에서 서로를 잘 이해하고 호흡이 잘 맞았다.

내가 가까이서 경험한 임 대령은 주변 사람들에 대해 늘 자상하고 섬세했으며 그 성격이 강직하고 청렴한 전형적인 군인상을 지닌 사람이었다. 그가 군대를 예편하고도 종종 안부를 물을 정도로 나 개인에게나 모든 군인들에게 귀감이 되는 인물이었다고 할 수 있다.

전쟁의 포화 속에서 그도 나도 죽음의 사선을 수도 없이 넘나들어야 했었던 그 시대를 생생하게 회상하게 하는 임 대령의 회고록이 출간된다는 사실이 참으로 반갑기만 하다. 평화로운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가 점차 잊어가고 있는 전쟁의 역사를 이 책을 통해 기억하게 될 것이다.
채명신 장군

3.발간 기념사

에바 하네부트 벤츠 박사
전 구텐베르크 박물관 관장
한국과 독일은 비슷한 운명을 가진 나라로 비교된다. 끔찍한 전쟁으로 인하여 나라가 분단되었고 두 나라 사이에 격차가 큰 정치사회적 발전을 경험했다. 이런 배경 때문에 독일은 늘 한국이라는 나라의 역사에 큰 관심과 특별한 애정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우리의 무한한 관심은 국가의 안녕과 자유를 위해 기꺼이 봉사하고 목숨도 아끼지 않은 위대한 인물들에게도 해당된다.
이러한 인물 중 한 명이 임익순 대령이다. 이제 그가 남긴 회고록이 그의 딸에 의해 세상에 소개된다. 어린 시절에는 일본에 의한 혹독했던 강점기를 살아내야 했고 청년이 되어서는 한국전에 직접 참여하였으며 장군으로의 진급을 코앞에 두고 전쟁포로가 되는 불운도 겪어야했다. 전쟁이 휴전되고 군대로 복귀한 후에도 민주대한민국을 건설하는데 그의 열정을 다했다. 무엇보다도 인상적인 것은 그가 포로의 신분에서도 용맹함과 지휘자로서의 능력을 상실하지 않고 장교로서의 품위를 지켰다는 사실이다. 
독일에도 이렇듯 자신의 정의로운 신념을 행동으로 옮겨 역사에 지대한 영향을 준 인물들이 자주 등장한다. 진보된 생활환경과 오랜 시간 기다렸던 통일독일의 관점에서 볼 때 완화정책에 기여한 독일의 수상이었던 빌리 브란트와 그 뒤를 이은 헬무트 슈미트를 들 수 있다. 그러나 1987년부터 시작된 구동독의 용기 있는 시민들의 항거 역시 그 공로를 빼놓을 수 없다. 이렇게 정치가와 민중에게서 각각의 이념과 전략이 한데 어울려 독일의 통일을 실현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이 지면을 통해 임대령의 회고록이 출간됨을 진심으로 환영한다. 일제시대부터 한국전까지 가치 있는 역사적 증인으로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은 정치적, 군사적 혹은 사회적 역사들이 재조명되어지는 계기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임대령이 살아온 삶에 대한 회고가 매우 상세하면서도 인상적으로 기술되어 있어 후세들로 하여금 한국의 역사를 되짚어보게 할 것이라고 생각된다.


집필자가 그토록 많은 이야기들을 자신의 기억 속에서 하나도 빠뜨리지 않았다는 사실이 놀랍고 기쁘지 않을 수 없다. 더불어 그의 회고록을 출간하여 많은 이들과 공유하고자 하는 딸 임진에게 감사할 일이다. 자칫 잊혀진 역사가 될 수도 있었지 않을까. 이 책이 다른 언어로도 번역되어 역사에 관심 있는 외국의 독자들에게도 소개되어진다면 좋겠다.

2013년 6월 오펜바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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