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백마고지의 영웅 임익순 대령 회고록 내 심장의 파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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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7년이 시작되는 아침이기도 하고 나의 인생역정이 다시 시작되는 순간이기도 했다. 지난밤 군용트럭에 편승해 이곳에 도착했다. 허벅다리까지 빠지는 진흙길을 헤치며 연대본부라는 건물로 들어섰다. 연대장인 조 소령과 장교 서너 명을 만났다. 막 외출을 하려던 참이었는지 간단한 인사만 주고받고 연대장 침실이라는 곳으로 나를 안내하고는 다들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 4평쯤 되어 보이는 방이었다. 일본군이 버리고 간 목제침대에 지푸라기로 만든 매트리스가 깔려있고 미군 모포가 몇 장 놓여있었다.
이 건물이 연대본부인 듯했고 출입구가 있는 제법 큰 방이 연대본부 사무실인 듯했다. 그곳에 사병 몇 명이 장작난로 옆에 모여앉아 잡담을 나누고 있는 것 외에는 인기척이 없었다. 나는 7시간 동안 비좁고 불편한 기차여행에서 피로가 누적되었는지 깊은 잠에 빠져버렸다. 그리고 잠에서 깨어난 그 순간이 내 인생이 새롭게 출발하는 순간이었다.
방 한 쪽에 김이 오르는 더운 물통과 세숫대야가 놓여 있었다. 세수를 하고 옷을 갖추어 입은 후 신발을 신으려고 했다. 지난 밤 진흙투성이가 된 장화를 어떻게 신나하고 장화를 찾으니 보이지 않았다. 웬일인가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있는데 사병 한 사람이 내 장화를 깨끗이 닦아서 들고 왔다. 나를 도와주는 사람이 있나보다 하는 생각과 동시에 오늘부터 내가 장교가 된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그 사병의 안내로 장교식당이라는 표지판이 붙어있는 방에 들어서니 한 사람도 없었다. 날라다 주는 아침식사를 마치고 사무실에 앉아 있으니 동기 신임장교들이 하나 둘씩 모여들었다. 그들은 시내에서 자고 오늘 아침에 들어왔다고 했다. 29명이 모두 모였다. 눈물의 ‘고구마꼬리’ 동기생들인 것이다. 얼마 후 나이가 좀 들어 보이는 P중위가 허겁지겁 들어오더니 자기소개를 했다. 연대 행정관이라고 했다.
그는 먼저 여러분들을 환영한다는 판에 박힌 인사말과 연시 휴무라 신고식은 1월 4일에나 거행될 예정이니 각자 소속부대로 가서 대기하고 있으라고 했다. 서류를 펴들고 인원 점검이 끝나자 각각의 소속을 알려주었다. 본부요원, 대대요원, 중대장 등이었고 소대장은 없었다. 이 연대는 2개 대대로 편성되어 있어 장교는 연대장 이하 10명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따라서 우리들 29명만 가지고 소대장까지 배치할 수는 없었다.
나는 이전에 물품정리 경험이 있다고 해서 연대 보급관에 임명되었다. 중대장을 바라고 있던 나는 내심 불만이었으나 P중위의 연대 보급상황을 설명 듣고 나서는 담당하게 된 보직에 대해 어떤 사명감과 동시에 감사의 마음까지 느껴졌다. 수일 후 P중위가 설명한 그 실체를 눈으로 확인하게 되었다. 사병들의 급식은 하루에 밥 한 끼와 밀가루 죽 한 끼로 형편없었고 일본군이 버리고 간 피복마저도 부족해서 사병들은 외출을 할 형편도 못되었다. 병사 건물은 이전에 일본군 조종사들이 예비훈련장으로 사용하던 것이었다.
건물에 유리창이라고는 거의 없어 그나마 재치 있는 자들은 어디선가 가마니를 구해다가 비바람을 가리고 있었다. 바닥에는 가마니를 깔았으나 그것도 모자라 맨 마룻바닥에서 자는 사병도 있었다. 그래도 그때의 사병들은 가슴 깊이 자리한 결의와 애국애족으로 뭉친 위대한 정신이 충만했기 때문에 그 같은 고충을 기특하게도 잘 견디어내었다. 이들 중에는 많은 수의 일본군 출신의 청년들이 섞여있었다.
그 때도 역시 경비대의 예산과 보급은 군정청에서 담당하고 있었는데 연대 고문관이 예산을 신청하면 도청의 미국인 도지사가 결재를 하고 한국인 도지사가 예산을 집행했다. 나는 사병들을 잘 먹이고, 잘 입히고, 편히 재우는 것이 나의 당면한 임무라고 자각하고 동분서주했다. 우선 미국인 도지사를 설득해 식량을 더 많이 배급받았고, 미군이 관리하던 일본군 피복창고를 인수했다. 한 번은 광주역에 미군 12칸짜리 화물열차가 도착해있었다. 행선지가 광주이고 수하인이 도지사였다. 열차에는 난민 구호물자가 실려 있었다. 고문관을 앞세워 미국인 도지사를 설득해 열차 3칸을 배당받았다.
배당받은 물품들을 운반해 창고에 쌓았다. 그러나 물품의 처리가 문제였다. 사병들에게 바로 먹일 수 있는 것들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쌀밥이나 시래깃국이 적격인 우리의 실정에 비스킷이나 캔디 등이 얼마나 도움이 되겠는가. 연대장을 비롯하여 행정관과 고문관이 참석한 연석회의에서 의논이 되었다. 우선 장교들에게 한 박스씩 그리고 각 단위 부대에 10박스씩 배급하고 나머지는 공매해 돈으로 만들어 백미를 구입하기로 했다. 회의에서 결정한대로 시행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일부 장교들이 욕심을 부리며 더 많은 양을 달라고 고집을 부리는 것이었다. 이들이 누구인가 살펴보니 대개가 피난민 출신으로 굶주리던 자들이었고 그들 중 대표적인 자가 B대위였다.
이 자는 일본군 소년항공병 출신으로 성격이 포악해 부하사병들을 모질게 구타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는 스리코터를 몰고 와 한 차 가득 실을 수 있는 양의 물품을 달라고 했다. 나는 완강히 거절하고 배당된 수량만을 내주었더니 그는 이상하리만치 순순히 돌아갔다. 그 당시 일부 장교들은 부하가 굶고 헐벗는대도 아랑곳하지 않고 모질게 대하는 자들이 많았었다. 후생미라고 해서 한 달에 쌀 한 자루씩 배급이 되었는데 한 자루로는 부족하다면서 두 자루를 내놓으라고 협박하는 자도 더러 있었다. 한 자루도 부하사병들의 몫에서 떼어주는 것이라고 설명해도 불만을 표하는 자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런 자들이 과연 부하들로부터 신망을 얻을 수 있을까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 이유에서 여순사건 때 이들 장교 중 세 명이나 사병들에게 참살 당한 일이 있다.
그러던 중 연대장 조 소령이 떠나고 정일권 중령이 후임으로 부임했다. 만군 소속 헌병대위를 지낸 정 중령은 인격은 원만해보였으나 팔방미인에 무사안일 주의자 같은 인상을 주었다. 그러나 오래 머물지 못했고 후임으로 임 씨 성을 가진 중령이 그의 후임으로 왔다. 이번 연대장은 영어 좀 한답시고 거들먹거리며 신임장교들을 노골적으로 업신여기는 바람에 젊은 장교들과의 관계가 원만하지 못했다. 그도 역시 얼마 되지 않아 떠났고 L이라는 중령이 새로 부임했다. 연대장이 계속 바뀌면서 어느덧 3개월이 지나고 육사 3기생 신임장교 50여 명이 보충되어 공석이었던 자리들을 채울 수 있게 되었다.
장교의 수가 늘면서 장교들의 후생문제까지 담당하던 나에게는 고충이 더해졌다. 사병들을 위주로 배급계획을 세우니 일부 장교들은 자신들에게 돌아오는 후생에 불만이 많았다. 대부분이 피난민 출신인 그들은 같은 입장에 있던 L 연대장과 한통속이 되어 나를 배척하기 시작했다. L씨는 복심장교를 시켜 나를 뒷조사하기도 했지만 곪지도 않은 곳에서 고름이 나올 리가 없었다.
여러 가지로 힘든 상황에서 그런 모욕까지 당하자니 나는 그 자리에 더 머물러있을 수 없다는 생각에 떠나기로 결정한 그 순간에 유명한 영암사건이 발발했다. 이 또한 공산주의자들의 농간에 의해 벌어진 일이다. L연대장은 현장으로 달려가 경찰 앞에서 지휘도를 풀고 두 손을 들어 항복을 했다. L씨의 행동에 일부 젊은 장교들은 불만을 품었으나 그에게 정면으로 항의하는 자는 없었다. 보다 못한 나는 L씨를 향해 거세게 항의를 했다. 그와 나 사이에 심한 언쟁이 오가고 나는 그곳을 떠나겠다고 선언했다. 이후 곧바로 찾아간 곳이 서울 통위부였다.
고급 부관인 최영희 소령에게 나를 38선 부대로 발령해달라고 부탁했다. 그 때 이미 4연대의 L연대장으로부터 나에 대한 파면상신이 도착해 있었으나 유등열 통위부장이 이를 기각한 상태였다. “애국지사의 자손이기도 하고 경비대 장교가 아니더라도 이런 시절에 더 나은 직업을 얻을 수 있을 텐데 경비대에 자진입대한 사람이다.”고 하시며 “희망지가 어디냐?”고 물으셨다. 나는 38선 부대로 가겠다고 했다. 나의 희망대로 춘천 8연대로 가게 되었다.
다음날 다시 그곳으로 가니 특명이 떨어져 있었다. 나의 입장을 이해하는 통위부장에게 감사인사라도 드리려고 그의 방으로 들어갔다가 오히려 위로를 받는 입장이 되었다. “사람이 어찌 그리도 옹졸한가. 연대장이 책임도 지지 못하고 사적인 감정으로 인사문제를 처리하다니.” 하시며 혀를 차셨다. 그리고 내게 묻기를 남들은 38선 부대에서 후방으로 나오려고 애쓰는 판인데 왜 나는 스스로 그쪽으로 가려고 하느냐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자네도 자네 조부장 못지않게 명사위국충성 해야 하네.” 라며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춘천 8연대에 부임하고 연대장에게 신고하려고 연대장실로 들어갔더니 사관학교 교장이시던 원용덕 대령께서 연대장으로 계셨다. 나의 신고식을 받은 원 연대장은 웃으시며 “여보게, 나 지금 샌드위치 신세라네.” 라며 양쪽으로 앉아있는 고문관을 돌아보셨다. 두 사람 사이에 끼어있다는 의미였다.
그 날로 나는 원주 2대대 소속임에도 불구하고 강릉 3대대에 배속되어있는 7중대장으로 보직임명을 받았다. 연대장과 점심 식사를 마치고 곧바로 강릉을 향해 떠났다. 그 당시에는 도시 간을 왕래하는 버스도 없었고 그날따라 군용차도 남아있는 것이 없었다. 강릉으로 가는 민간인 트럭을 어렵사리 얻어 타고 이틀 만에 강릉에 도착했다. 대대장인 송효찬 대위에게 신고를 하고 7중대로 가보니 기간요원만 10여 명에 달했고 중대원이라고는 한 명도 없었다. 한 장교가 모병부터 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삼일 정도 중대의 현황을 파악한 후 곧바로 도계인 울진으로 모병을 떠났다. 울진의 청년들은 애국열이 대단했다. 모집인원보다 훨씬 많은 수가 지원을 했고 어떤 이는 혈서로 지원의 뜻을 표하기도 했다. 선발하는 일이 오히려 더 어려웠다. 선발된 인원을 인솔해 귀대시킨 후 편성을 하고 훈련을 시작했다. 기초훈련이 끝나고 연대장의 검열이 있었다. 연대장은 합격을 축하하며 치하와 더불어 상금도 두툼하게 건네주셨다.
군에서 철도관사를 수용해 주택은 여유가 있었지만 장교가 부족해 나는 그곳에서도 보급관직을 겸해야했다. 요소요소에 배치된 중대를 돌아보랴 대대에 보급을 하랴 무척 분주했지만 젊은 기백 하나로 잘 해냈다. 그 해 겨울에 전주 3연대로 전속발령을 받았다. 경포대도, 오죽헌도 좋았고 특히 해변을 좋아하는 나는 그곳을 떠나기 싫었으나 명령에 따라야했다. 남부여대와 전주 3연대로 부임하고 이리 3대대 12중대장에 보직되었다.
그러나 이곳 역시 강릉의 7중대와 다를 게 없는 상황이었다. 또 모병을 해 중대를 창설하고 병사를 훈련해야 하는 과제가 놓여있었다. 12중대의 편성에 따르면 중화기 중대였으나 중화기를 보유하기는커녕 소총자루도 일본군이 버리고 간 99소총 정도에 불과했다. 어쨌든 있는 소총만 가지고 철저한 훈련을 했다. 강릉에서는 도망병이 단 한 명도 없었는데, 이곳에서는 몇 명의 이탈자가 있었다. 이탈자들이 다른 중대로 간다는 말을 듣고 조금은 안심이 되었다.
그해 가을에 중위로 진급되었다. 다른 동기들에 비해 4개월이 늦은 셈이었다. 4 연대 L중령이 진급을 추천하지 않아 진급대상에서 누락이 된 것이었는데 이곳 연대장인 송호 대령이 특별히 추가로 발령을 조치한 것이다. 그 무렵부터 송호 대령은 나를 총애했다. 겨울이 가고 봄이 왔다. 이렇게 나의 새로운 출발이 시작된 것이다.
12. 조부님의 별세
오늘은 3.1절. 내가 양성해낸 사병들을 앞에 모아놓고 3.1절의 역사적 사실과 의미 그리고 나의 조부님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해방이 되고 몇 차례 3.1절을 맞이했지만 그날의 3.1절은 무엇보다도 뜻 깊고 감개무량했다.
집으로 가서 조부님의 안부를 살피니 다소 쇠약해진 모습이셨다. ‘노령이라 그러시겠지.’ 라고 생각하며 부대로 돌아왔다. 그 해인 1948년 3월 7일 아침나절에 급보가 날아왔다. 조부님이 위독하시다는 전갈이었다. 조부님은 그 날 12시에 운명하셨다.
지방 호족의 아들로 태어났으나 소년기를 제외하고는 일생 동안 가시밭길을 지나 오셨지만 꿈에도 잊지 못하신 조국 독립을 못 보고 가신 조부님이 제대로 눈을 감으셨을까? 조부님이 마지막으로 하신 말씀은, “소위 독립운동가라고 하는 자가 침략자나 매국노반역자의 손에 죽지 못하고 자손들 앞에서 편하게 죽는 것이 천추의 한이다.” 하셨다 한다. 한 자연인으로의 유언이라기보다는 한 민족의 외침이리라. 조부님의 행적이나 공적은 우리나라 독립운동 기록이나 우리 집안의 족보와 비문에 기록되어있어 이 지면에서는 생략하기로 한다. 그러나 조부님의 유언을 되새기니 한 가지 생각나는 일화가 있다.
조부님께서 기미독립운동 후 재판을 받으실 때 이야기다. 조선총독은 그때까지의 탄압정책을 지양하고 소위 ‘문화정치’를 내세워 유화정책을 펼쳤다. 따라서 당시 독립운동 관련자들의 형량에 대해서도 상당히 너그러운 편이었다. 재판관은 무죄를 선고했지만 조부님은 유죄로 판결하라고 즉석에서 항고 하셨다고 한다. 무거운 죄를 가볍게 하는 항고는 있으나 무죄판결을 유죄로 뒤집는 항고는 재판사상 전무후무한 일이라고 전해진다. 그러니 돌아가시는 순간, 편안한 환경에서 생을 마감하시는 것을 오히려 죄스럽게 생각하시고 “비명에 가지 못하는 일이 천추의 한.”이라고 하셨다는 말씀도 충분히 이해가 된다. 조부님의 숭고한 애국애족 정신을 나는 평생 간직하며 산다.
조부님은 3.1 운동 후에도 보성전문학교를 비롯하여 사학에서 후진 교육에 헌신하셨고 민중의 교풍운동에도 참여하셨다. 문학에 조애가 깊으신 조부님은 저서도 적지 않게 남기셨고 시집도 출간하셨다. 시집은 해방 전에 쓰신 것을 집대성해서 모아주신 것을 해방 후 내가 영인본으로 출간해서 뜻있는 분들에게 배포했다.
학원지에도 수필을 자주 실으셨는데 지금도 내 기억에 남아있는 것이 있다. ‘구부러진 나무는 제 아무리 능력 있는 목수라 하더라도 바로 잡을 수가 없다. 사람도 한 번 구부러지면 바로 잡기 어려우니 애초부터 구부러지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옥편도 편찬하셨고 국문사전의 원고를 쓰시는 것을 내가 소년시절에 직접 보기도 했다. 그러나 그 책은 일제에 압류 당했다는 후문이다.
조부님의 글 가운데 세기적이고 역사적 의미를 갖는 것은 기미년 3.1운동 당시의 독립선언문이다. 지금의 역사가들은 그것을 육당 최남선이 작성했다고 하나 실제로는 조부님께서 골격을 짜고 초안을 잡아 최 씨에게 정리하도록 한 것이라고 해방 후 조부님으로부터 내가 직접 들은 이야기다.
좀 더 자세하게 설명하자면, 그 당시 조부님이 일본에서 돌아오실 때 일본인 여자 한 분을 데리고 오셨다. 조부님이 일본에서 유학할 당시 하숙을 하던 집의 딸인 일본인 여인에게는 중학생 아들이 한 명 있었고 남편과는 오래 전에 사별한 처지였다. 그 여인은 일본정부의 외국 침략에 대해 철저한 반감을 가지고 있던 사람으로 동경에 산재해있던 조선인 유학생들을 물심양면으로 도와주기도 했다. 조부님과는 한 집에 오래 살아서인지 속된 말로 정분이 났었는지도 모른다. 어쨌든 조부님이 환국하실 때 그 모자가 함께 왔다고 한다. 지금은 쌍림동인 당시의 병목정에 기거하셨는데 일본경찰의 눈을 피하기에 좋은 은신처였다고 한다.
그 시절에 손병희 선생으로부터 독립선언서를 기초하라는 명을 받은 육당이 병목정에 살고 계시던 조부님을 찾아온 것이다. 조부님과 육당은 나이 차이가 20세 정도 되었지만 절친한 사이였다. 조부님께 3.1운동의 태동을 알려드려 그 일에 가담하시게 한 분도 육당 최남선이다. 조부님은 기꺼이 그 일에 착수하셨다. 진고개에 희락관이라는 영화관이 있었다. 그 영화관에서 뿌리는 전단지(최하의 종이 질)의 뒷면 여백에 선언문을 기초하셨다고 말씀하셨는데 최근까지도 보관되다가 일본 말기에 탄압을 피하기 위해 동서로 옮겨 다니시는 도중에 분실하셨다고 한다. 참으로 애석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 원고가 남아있다면 왜곡된 역사도 바로 잡을 수 있을뿐더러 그 자체가 위대한 역사의 유물이 되었을 것이다.
그렇게 쓰인 초고를 최 씨는 조부님 집에 있는 오시이레(이불 등을 넣어두는 벽장 같은 골방)에 들어앉아 밤을 새워가며 살을 붙이는 작업을 했다. 그 다음날 일단 완성된 독립선언서 원고를 일본여인의 아들이 옷 속에 넣어 손병희 선생에게 전달했다고 한다. 그러나 보완해야 할 부분이 있어 원고가 되돌아왔다. 보완작업을 마친 원고를 이번에는 현 씨(후에 보성전문학교 교장)가 조부님 댁으로 가지러 왔다. 현관으로 들어서는 현 씨를 일본인 여인이 맞이했다. 난데없이 일본인 여자의 인사를 받은 현 씨가 기겁을 하며 돌아나가려 하자 여인은 조용히 웃으며 “이것을 가지러 온 것이지요?”라며 앞가슴에서 그 원고를 꺼내주더라는 것이다.
역사에는 세 번에 걸쳐 보완했다고 전해지는데 세 번째는 어떤 경로로 원고가 전달되었는지 나는 더 이상 알지 못한다. 인쇄된 독립선언문을 운반하는 일에도 그 일본인 여인의 아들인 중학생이 큰 역할을 했다고 들었는데 정확한 내용은 모르겠다.
조부님은 한 때 일본인 애첩을 데리고 있다고 약간의 오해도 받았으나 앞에서 설명한 배경 때문이었고, 정부수립 후 그 여인이 작고하셨다는 소문이 들리자 당시 국회의장을 지내신 해공 신익희 선생과 당시 일본 유학생 출신 여러 명이 조의금을 모아 보냈다는 내용이 보도되었다.
나는 우리의 역사가 올바로 잡히는 날 3.1 독립선언문의 원작자가 누구인지 밝혀지리라 확신한다. 한 가지 더 덧붙이자면, 지금의 퇴계로(병목정)를 서울시에서 개통할 때 그곳에 있던 조부님 집이 철거를 당하게 되었다. 그 당시 학계와 특히 조선일보에서는 그 건물이 3.1 독립선언문의 산실이기 때문에 적당한 장소로 이전해 보존하자는 주장을 했었다.
3.1운동의 여파도 잠잠해지고 총독부에서는 유화정책을 펼쳤다. 조부모님께도 높은 벼슬자리를 주겠다며 교섭이 다가왔다. 조부님은 일언지하에 이를 거절하시고 가난한 가운데서도 담담하게 생활하셨다. 그러던 중 가장 친분 있는 동지 한 분이 그들에게 포섭되어 반민족행위를 하게 되었다. 조부님께서는 사시던 성북동 토담집에서 가까운 동지 몇 분과 함께 명태 한 마리와 탁주 한잔을 차려 놓으시고 반역한 친구의 ‘정신적 죽음’을 추도하셨다고 한다.
일제 말기에는 성북동 토담집마저도 일경의 감시가 더욱 심해졌으나 그보다 더 큰 곤란은 식량을 비롯해 담배 등의 배급제도 때문에 생활에 위협이 되었기 때문이다. 70세 넘은 노인이 배급을 받겠다고 줄을 서서 기다릴 수도 없고 조석으로 시중을 드는 사람도 자기 일이 바빠 여유롭지 못했다. 그런데 감시명령을 받고 파견 나온 경찰고등계 형사인 최 모 씨가 오히려 식량을 몇 말씩 구해다 주고 간 것이다. 또한 그는 일제 말기에 이르러 특별 요시찰 인물들을 모조리 처형할 계획이라는 정보를 조부님께 알려주며 지방으로 은신하라고 조언도 해주었다. 덕분에 조부님은 고향으로 내려가시어 폭풍을 피할 수 있었다고 한다. 해방이 되고 최 씨를 만나보려고 사방으로 찾아보았으나 끝내 찾을 수 없었다.
조부님께서는 70대 후반기부터 활동을 못하셔서 당연히 생활도 곤란해졌다. 그러나 본성이 청렴하신 분이라 지금은 대도시가 되었지만 그 당시에는 산간벽지와도 같았던 성북동 산골짜기에 길도 나있지 않은 곳에 서있는 토담집에서 기거하셨다. 그러나 늘 초연하셨고 산수와 달빛을 벗 삼아 여러 시우들과 시회도 여러 번 가지셨다고 한다. 남기신 시집에 그 당시 걸작시가 여러 수 들어있다.
조부님이 작고하신 그 해 10월 24일 추모식이 거행되었다. 그 때의 관련 서류는 고향에 보관하셨으나 6.25 전쟁 시 모두 분실되었으며 초청장이 단 한 장 남아있어 여기에 옮긴다.
경계 공사로 다망하신 이 때에 귀체청목 하심을 근축하오며 기미운동 당시 사십팔 인의 한 분이신 고 우정 임규 선생이 익산 항제에서 장서하신지 이미 반년. 선생이 일신일가를 불고하시고 오즉 민족국가를 위하여 국궁진췌 하시다가 아직도 국가 독립의 완성을 보시지 못하고 뜻을 품은 채 유명을 달리 하시였음은 평소 선생을 존앙하던 우리들이 다 같이 애도의 정을 금할 길 없는 일 이온바 이제 선생의 영전에서 엄숙한 추모의 하루를 드리고저 하오니 동지 위는 소만동참 하심을 경요하나이다.
단기 4281년 10월 일
발기인 이시영
오세창
최규동
조소앙
신익희
정인보
백관수
이상천
소병원
권오순
이상 무순
시일 4281년 10월 24일 (일요일) 오전
장소 중등학교강당
그 때 나는 부산 제 5연대 3대대장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나도 추도식에 참석하려고 준비를 마치고 있었는데 여순반란사건의 잔존 공비가 지리산에 침투해 있으니 그들을 소탕하라는 명령이 떨어져 부득이하게도 참석을 하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이 역시 내게는 천추의 한으로 남아있다.
이렇듯 큰 별이 하나 떨어지고 영원히 가신 것이다. 우리 자손들은 그 분의 일생을 건 명예에 손상이 가지 않도록 명심해야 할 것이며 그 분의 애국애족 정신을 본받아야 할 것이다.
13. 지프차와 소총
3연대에 부임해서는 탈락되었던 진급도 되고 중대도 창설했다. 교육도 성과가 좋아서 일기당천의 정예군인도 양성되었다. 이제는 이곳에서 당분간 자리를 잡고 정착을 할까 하는 생각을 했다.
모병에 지원하는 청년들 대다수가 이 지방 토박이로 뜨내기들과는 본질적으로 달랐다. 모두들 가슴 속에 뜨거운 무엇인가를 간직한 사람들이었다. 지극히 열악한 환경과 대우에도 잘 참아주었다. 무엇보다도 탈영병이 없다는 일이 자랑스러웠다. 내 중대의 명예이기도 했지만 나아가서는 우리 고향의 자랑거리가 되기에도 충분한 일이었다. 이 지방의 각 기관에는 옛 친구들이 근무하고 있어서 협조도 잘되는 편이었다.
대대장 고근홍 대위는 나를 부대대장으로 임명하고 부대행정을 일임시켰다. 내가 군인이 된 이후로는 행정업무를 그다지 즐겨하지 않아서 썩 즐거운 일은 아니었지만 군대의 인사행정도 익혀둘 필요가 있다는 생각에 이의 없이 업무를 수행했다.
그런데 제주도에서 공비들에 의해 폭동이 돌발했다. 소위 4.3사건이다. 우리 3대대가 그들을 토벌진압하기 위해 그곳으로 출동하게 되었다. 심혈을 다 해 길러낸 나의 중대로 보기 좋게 일격을 가해 무찌르리라 하는 각오로 사기충천해 출동준비를 서두르고 있었다. 그런데 이게 무슨 날벼락인지. 서울 병기대대로 전출명령이 떨어졌다. 나 자신도 가기 싫었고 대대장은 더욱 못마땅해 했다. 출동을 앞두고 있는 장교를 빼앗아가는 경우가 어디 있느냐고 항의했지만 명령은 명령이었다. 몇 차례 옥신각신 했으나 승산이 없었고 나는 명령대로 서울로 부임해야 했다.
영등포에 자리한 병기대대로 갔더니 놀랍게도 대대장이라는 자가 앞에서 이야기한 안기수라는 자였다. 무슨 수를 썼는지 소령이 되어있었다. 나는 그의 휘하에 있는 제 1 중병기 정비중대의 중대장이 되었다. 이 중대는 부평에 있는 미군 K캄 G부대에 편승되어있었다. 중대의 임무는 장래에 정부수립과 동시에 국군으로 개편될 경비대에 배급할 M1카빈 소총과 LMG 자동소총 등과 장교용 4.5구경 권총 그리고 지프차 200대를 정비하는 일이었다. 그 임무는 대단한 보람과 긍지와 명예를 갖게 하는 임무임에 틀림없었다.
서울로 온 것이 오히려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자동차 정비는 자신이 있었으나 개인 또는 공용화기의 정비는 조금 문제가 되었다. 약 200명이 넘는 중대원 전체 가운데 기술자는 단 한 명도 없었고 대부분이 각 연대에서 차출되어 온 오합지졸들이었다. 그 때나 지금이나 차출대상이 되는 병사들은 무능력자나 사고뭉치들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기술자 한 명 없는 오합지졸을 데리고 어떻게 이 임무를 수행할지 막연하기만 했다. 나는 우선 나의 숙소를 부대 안으로 옮기고 사병들과 숙식을 함께 했다. 다행히도 미군 고문관과 장교, 사병, 문관 등 18명이 나를 적극적으로 지원해주어 부속품도 풍부했고 공구도 이전에 보지 못했던 최신형들로만 갖출 수 있었다.
처음 일주일 동안은 나사를 조이고 푸는 방법부터 교육을 시켰다. 미군들은 수요일 오후와 토요일은 내무사열 정도하고 쉬는 것이 그들의 규칙이었지만 나는 이 규칙을 없애고 하루 한 시간씩 더 연장 근무를 했다. 그렇게 해야만 2개월 내에 지프차 200대와 8개 연대분의 소화기를 정비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장교라고는 단 두 사람밖에 없었다. 다른 한 명에게 소화기 정비 소대를 맡기고 다른 한 사람에게는 차량정비에 임하도록 배치했다.
한 달 만에 정비해야 하는 양의 약 60퍼센트를 완수했다. 그 때 육상경비대 총사령관이던 송호 장군이 통신용 스리코터를 타고 우리부대를 방문했다. 정비가 완료된 차량과 소화기를 두루 살펴보더니 무척이나 기뻐했다. 나는 그 분이 그 흔한 지프차 한 대 없어 통신용 차량을 타고 다니는 것이 안타까웠다. 다음 날 수석고문관과 의논 후 지프차 한 대를 정성스럽게 정비해 몰고 가서 장군에게 드렸더니 “생애 최고의 선물!”이라며 어린아이처럼 좋아하셨다. 그 기뻐하던 모습이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된다.
정비 업무에 착수한지 만 50일이 되는 6월 말까지 차량과 소총 등은 완전하게 정비되어 각 연대의 대대장에게까지 할당되도록 보급을 완료했다. 필사적이었던 작업이 진행되는 가운데 나는 그 해 7월 1일자로 대위에 진급되었다. 진급이 기쁘기도 했지만 ‘사필귀정’이라는 말과 함께 4연대의 L중령에 대한 기억이 떠올랐다. 이후에도 대형차량과 소구경야포 등의 정비작업은 계속 진행되었고 감격의 8월 15일 우리민족은 새로운 정부를 수립한 날이 왔다.
어깨 밑에 반월형으로 부착하고 다니던 조선경비대 표시를 떼어버리고 당당한 국군이 된 것이다. 나는 내가 직접 정비한 지프차를 몰고 광화문 네거리로 나갔다. 우리 국군의 행진을 보기 위해서였다. 지방에서 올라온 각 연대의 행진은 다소 서투르기는 했지만 제법 볼만했다. 그 행진에 참가한 연대장과 대대장들이 내가 정비한 지프차에 타고 있었으며 사병들의 어깨에는 M1 소총과 대검들이 빛을 내고 있었다. 모두 나의 손을 거쳐 간 것들이라 남다른 감회와 명예를 느끼며 행진을 바라보았다. 새롭게 창건된 우리 국군이 처음 보급 받은 신식무기를 내가 손질했다는 자부심은 두고두고 자랑스러운 일이리라. 더욱이 아무것도 모르던 오합지졸 중대원들이 코피를 쏟아가며 쉴 새 없이 노력한 공로를 생각하니 코끝이 찡해왔다.
감격의 날도 지나가고 다시 공용화기와 대형 차량을 정비하고 있던 중 또 전속 특명이 내려졌다. 이곳에 오래 머물면서 대형병기까지 정비해 우리 국군에 공급하려던 계획은 나의 욕심에 불과했다. 아쉬운 마음이 간절했지만 송충이는 솔잎을 먹어야 한다고 하지 않았는가. 그렇다. 나는 보병이고 특기는 전투병과 지휘관이다. 나의 본래의 위치로 돌아가자며 마음을 정리했다. 그러나 그늘에 가려진 뒤편에서 이제는 독립된 국군들에게 병기를 공급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위안을 삼고 그곳을 떠났다.
14. 지리산
심하다싶을 정도로 잦은 전속에 나 스스로 회의를 느끼며 항도부산 보병 3여단에 도착한 때는 안개비가 자욱한 9월 말이었다. 여단장은 중국군 출신으로 계급이 준장이었으며 나이가 지긋하고 온후한 성품의 초로였다. 10월 2일 연대장 장도영 중령의 요청으로 5연대 3대대장에 보직되었다. 감천리를 내려다보는 산 중턱에 자리한 그곳 대대 역시 갖춰진 시설 하나 없었다. 일본인이 남기고 간 창문도 제대로 없는 목조건물에 기간요원들만 있는 부대였다.
우선 건물을 정비해야 병사로 사용할 수가 있었다. 그리고 또 모병을 해야 했다. 나의 대대 건설을 돕기 위해 미군 고문관인 중위 한 명이 파견되었다. 매우 신경질적인 성격의 소유자였으나 잘 다독여주었다. 그래서인지 나를 잘 도와주는 편이었다. 그는 미군 공병대 중장비를 빌려다 연병장과 진입로 등 여러 가지 공사를 도와주었다. 건물 보수자재와 훈련용 각종 장비와 탄약도 제법 잘 조달해왔다. 그 당시 고문관이라고 하면 인식이 좋지 않았으나 잘 다루면 유익한 존재였다.
병영이 어느 정도 면모를 갖추게 되어 모병을 시작했다. 우리나라 제 2의 도시인 부산에서 자칫하면 건달이나 부랑자들이 섞여 들어올 수도 있지 않을까 불안하였으나 때마침 서북청년회와 대한청년단이 정치적으로 해체되는 바람에 이들 중 5 백 명 가량을 수용하게 되었다. 그들은 나름대로 국군이 되는 것을 꿈꾸며 결성된 무리들이었기 때문에 훈련도 어렵지 않았고 정신상태도 잘 무장되어 있었다. 청년단 시절부터 기초훈련이 잘 되어있어 단기간에 분대훈련은 물로 소대훈련까지 가능했다. 연말까지로 목표했던 기초훈련 기간에 소대훈련까지 달성한 것이다.
나는 좀 특이한 훈련을 한 가지 시도했다. 밥을 굶은 것과 잠을 자는 훈련이었다. 밥을 굶는 훈련은 토요일 낮과 일요일 아침식사를 거르게 하는 것이었다. 군인이 끼니를 꼬박꼬박 챙겨먹을 수 있는 입장이 아니기 때문이다. 나는 그것을 직접 경험한 사람이기도 하다. 그래서 한 두 끼니를 굶어도 견딜 수 있는 훈련을 한 것이다. 다른 하나는 어느 때든, 어느 곳에서든 잠 잘 수 있는 기회가 있으면 즉시 잠들 수 있는 훈련이었다. 피곤할 때 단 5분이라도 잠을 자면 피로가 풀리는 것 또한 나의 경험에서 온 것이다.
훈련 때문에 소비하지 않은 식량과 부식비는 월 단위로 모아서 사병들이 매월 한 번씩 외출할 때 시내에 지정한 식당에 가서 한 끼를 푸짐하게 먹을 수 있도록 했다. 이렇게 사병들을 배려하니 사기도 높아지고 당연히 성과도 좋아졌다.
그 무렵 이리에 살고 있던 가족이 부산으로 왔다. 나의 대대가 있던 곳이 지금은 대도시가 되었지만 그 때는 변두리의 쓸쓸한 어촌이었다. 그곳 어장 주인의 문간채에 있는 방을 빌렸다. 집주인 덕택에 신선한 생선을 많이 먹을 수 있었다.
1948년도 저물고 49년 새해가 밝았다. 그 때 여순반란군이 지리산으로 도망쳐 주변 부락은 물론 소도시까지 돌아다니며 약탈과 살인, 방화를 자행하고 있었다. 이를 진압하기 위해 부산 5연대 1대대와 전주 3연대 일 개 대대가 출동하였으나 계절과 지리적인 문제로 고전을 겪어야했고 피해도 막심했다.
새해 첫 날 장도영 연대장이 지리산토벌대를 시찰 차 방문한다고 하기에 나도 수행을 하기로 했다. 당시 1대대장이 하갑청 대위였다. 그는 나이도 젊었지만 일본군 징병 하사 출신이라 경험도 풍부하지 않았다. 따라서 작전을 여러 번 실패했고 그에 따른 피해도 적지 않았다. 그 날도 대대 전원이 출동해서 하 대위는 자리에 없었다.
경찰서장실에 장 연대장 이하 서장과 군수, 유지대표 등이 모여서 회의 아닌 회의를 하고 있었다. 오후 늦게 하 대위가 돌아왔다. 상황을 들어보니 무모한 작전만 펼치고 있었다. 연대장 역시 공비토벌 작전에는 전혀 경험이 없는 사람이라 그저 막막하기만 한 눈치였다.
그 날도 산 아래 부락이 공비들로부터 약탈을 당했다. 서장실에 모여 앉은 이들은 서로 얼굴만 마주 볼 뿐 뾰족한 대책을 내놓지 못했다. 단순히 수행원 자격으로 그 자리에 있던 나는 양해를 구하고 대게릴라 작전의 원칙을 설명했다. 나라고 잘 알 리가 없었지만 옛날 만주시절 얻어들은 풍월 정도였다. 그러나 나의 설명이 그 순간만큼은 큰 활력소로 작용했다.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 모두가 연대장을 향해 하 대대장을 임 대위와 교체해 달라고 간청했다. 하 대위 자신도 직접 지휘를 해보니 더 이상 자신이 없다고 돌아갈 것을 희망했다. 나는 내가 훈련시킨 부하들과 함께 하겠다는 조건으로 9월 10일 교체를 수락했다.
기차 편으로 진주에 도착하니 시민들의 열광에 가까운 환영은 표현조차 어려웠다. 자동차 차주들이 자진해서 차출한 트럭에 나누어 타고 전투대형을 유지하며 그날 늦게야 산청군 소재지인 산청면에 도착했다. 그곳 산청군민들의 환영도 역시 열광적이었다. 공비들로부터 습격을 당한 쓰라린 경험 때문이리라.
다음 날 즉시 작전구상에 들어갔다. 적정이 캄캄했다. 경찰이나 민간정보도 전혀 없어서 작전을 세우는 일이 쉽지 않았다. 지리산은 넓고 높다. 일제 강점기 때 징병을 피해 지리산 속으로 도피한 조선청년들을 색출하는데 소요되는 병력이 자그마치 5개 사단에 달한다는 계산에 조선군 사령관은 이 작전을 아예 포기하고 말았다는 이야기도 전해왔다.
이 광활한 밀림에 숨어있는 약 150명의 공비들을 어떻게 포착하느냐가 제일 큰 문제였다. 당면의 적은 공비보다도 기후와 밀림과 험악한 산세였다. 지리산 산자락에 사는 한 80세 노인의 말이, 겨울철에 지리산을 가로질러 넘어가거나 오는 사람을 지금까지 본 적이 없다고 했다.
1미터 이상의 높이로 쌓인 눈은 허리까지 올라와 길을 가로 막았다. 난관은 그것만이 아니었다. 장비도 부족했고, 밥을 해먹을 수 있는 반합이나 목을 축일 수 있는 수통도 없었고 동상을 막을 방한복과 방한화도 물론 없었다.
아무리 훈련이 잘 된 군대라 하더라도 환경조건이 어느 정도 갖추어져야 그 능력을 발휘할 수 있다는 것은 동서고금을 막론한 진리일 것이다. 아무리 사기가 왕성하다고 해도 맨주먹과 굶주린 배로는 싸울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조선군 사령관처럼 이 작전을 포기할 생각은 없었다.
나는 우선 사병들의 체력유지를 위해서 그들이 먹기 싫다고 할 때까지 돼지고기를 공급했다. 체내에 지방질을 축적해서 동상을 예방하려는 것이었다. 또 돼지기름을 모아두었다가 작전에 참가하는 사병의 얼굴과 손에 바르게 해 동상을 예방했다.
반합이 없어서 밥을 가지고 갈수가 없었다. 처음에는 주먹밥을 가지고 갔으나 얼어서 먹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쌀을 볶아서 주머니에 넣어가지고 다니며 먹게 했다. 물은 눈이나 골자기 물로 해결했다. 때마침 배급 나온 미군 모직양말을 있어서 귀마개 겸 마스크로 사용하게 하고 고추를 사서 양말 속에 한 두 개씩 넣었더니 동상을 예방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그 해 나의 대대에서는 동상환자가 한 명도 발생하지 않았다.
적정을 파악하기 위해서 3명 혹은 5명 단위로 조를 편성해서 지리산 밀림 속 깊이 침투시켰다. 한 편 그 시점까지도 군과 경찰에 침투되어 있던 프락치들이 속속 색출되었다. 그리고 서먹서먹하던 경찰과의 관계도 급속도로 개선되어갔다. 우리 지역에도 경찰전투부대가 약 100명 정도 주둔해있었다. 이들은 임시로 편성된 급조부대라 카빈소총도 제대로 다루지 못하는 수준이었다.
나는 경찰과 먼저 단합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경찰전투대를 훈련하기로 했다. 그들에게 사격술부터 훈련시켰다. 그러면서 서로 간에 친근감이 형성되었다. 나는 군수나 서장과 친분을 쌓았고 장교들은 경찰간부들과 그리고 사병들은 일반경관과 서로 친구가 되었다. 후에는 순경과 일병이 어울려 선술집에서 술을 마시는 광경도 볼 수 있게 되었다.
그러는 가운데 나는 지도와 씨름했다. 약 일주일 쯤 지나니 눈을 감아도 지도가 선명하게 보였다. 공비가 잠복해 있을만한 골짜기 등이 보이는듯했다. 그래서 수색조를 파견해보면 공비들이 그곳에 머물렀던 흔적이 발견되고는 했다. 그러면서 공비들의 습성을 파악했다.
경찰과의 원만한 유대관계를 위해 노력하면서 동시에 민심수습에 나섰다. 그때까지는 부식을 현지에서 조달했다. 그 작은 면소재지에 대대병력이 필요한 양의 식량이 있을 리 없었다. 그곳 시국대책위원회 간부들의 고초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차량과 된장, 간장을 모두 공출당한 농민들은 다음해 농사를 무엇으로 지을지 공비에 의한 피해보다 상황이 더 참담했을지도 모른다.
다음날부터 자동차를 부근의 마산과 진주 등지에 보내어 부식을 조달하도록 했다. 민폐를 근절해야했다. 그리고 부근 도시의 연예인들을 불러다가 산간벽지까지 위문공연을 하면서 민심을 수습하기도 했다. 사병들의 사기는 하늘을 찌를듯하고 군경 간에 신뢰가 생기고 민폐를 없애니 민심이 수습되었다. 또한 정보수색 작전을 통해 적정이 조금씩 드러나기 시작했다.
수색대의 정보를 종합 분석한 결과 공비들의 이동루트와 행동반경을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었다. 밀림 속에 사는 야생동물들도 그들이 늘 다니는 길이 있다. 공비들은 그래도 인간이 아닌가. 인간인 그들이 다니는 길이 없을 리 없다. 그 것을 파악한 후 공비들이 다닐만한 길의 요소마다 잠복조를 투입시켰다.
며칠 후 낙오된 공비를 한 놈 잡았다. 그는 14연대 출신으로 여순사건 때 도매금으로 공비가 되어 지리산 밀림 속으로 도망쳐온 것이었다. 그러나 그를 동정할 수는 없었다. 공비가 되기 싫었으면 이곳에 오기 전에 탈출을 했어야했다. 이곳까지 와서 방화와 살인, 약탈의 만행에 가담하지 말았어야 했다. 그러나 그는 공산주의 이념 따위와는 거리가 멀었고 나이도 이십 세가 채 안된 어린 나이였다. 나이는 어렸지만 제법 똘똘했다. 더러는 우리에게 유리한 정보도 주고 길안내원이 되어주기도 했다.
그 무렵 지리산 서부지역에 출동한 모 연대는 수차례에 걸쳐 공비의 기습을 당하면서 병기와 군수품을 약탈당해 ‘공비보급부대’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였다. 반면 나의 부대는 공비들의 공포의 대상이 되었고 일반 민간인들은 자기들이 길들인 호랑이처럼 믿음직해했다. 그만큼 우리에 대한 신뢰감이 컸다.
우리가 은밀하면서도 지속적으로 작전을 펼치고 있는 줄을 모르는 사람들은 궁금해 했고 연대장마저도 초조한 기색을 보였다. 그리고 나 자신도 조금은 초조하기도 했다. 2월부터는 일체의 흔적을 발견할 수 없었다. 후에 안 일이지만 그들은 약 2개월 동안 소위 무연작전이라고 해서 이동은 물론 모든 행동을 중단하고 땅 속 깊이 숨어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도 먹어야 살 수 있는 인간이었다. 촌락에서 보급투쟁을 하지 않는 대신 부락에 침투해있는 세포들을 통해 보급품을 특히 식량을 조달하고 있음을 감지하고 주로 부근 부락에 수색대를 잠복하게 했다.
마침 진주에 장이 선 날 밤이었다. 필요 이상의 식량과 일용품을 사가지고 오는 한 농민을 체포해 조사했더니 그런 사실이 드러난 것이다. 그가 잡히면서 산 속의 공비들에게는 공급로가 끊겨버린 것이다. 4월 초가 되어 그들이 다시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결정적인 시기가 온 것이다.
그 날 오후에 적정이 입수됐다. 지리산 잔돌배기에서 곧장 내려오면 계곡입구에 거림리라는 화전민 부락이 있었는데 4, 5 가구가 모여 살고 있는 곳이었다. 우리 주둔지에서부터 약 3킬로미터 가량 산골짜기를 거슬러 올라가야 하는 위치였다. 따라서 그 부락의 입구만 막으면 난공불락의 자연요새가 되는 것이다. 표고 1천 미터 가량 되는 높은 곳까지 토벌대가 나타날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한 그들은 부락에 있는 양곡을 모조리 약탈해서 밥을 지어먹고 볏짚으로 짚신을 삼고 있었다.
그들은 토벌대가 출동해도 밤에는 못 올 것이며 다음날 일찍 행동을 개시해도 정오쯤에나 도착하리라고 계산하고 있었던 듯했다. 그래서 안심하고 그 날 밤은 그곳에서 지내기로 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정보를 입수하게 됐는지 궁금할 것이다. 나는 부락 단위로 경계조를 조직하게 하고 초병을 부락 내에 두지 않고 약 1킬로미터 떨어진 외곽지역에 있게 했다. 부락에 공비가 들어오면 미리 약속된 수단으로 이들에게 연락을 취하고 그는 바로 인근에 있는 국군잠복대나 경찰에 보고하도록 훈련을 했었다. 그때도 그 부락에서 8백 미터 가량 아래쪽 언덕에서 그 동네 청년이 잠복근무를 하다가 공비가 침입한 것을 알고 즉시 달려가 보고를 한 것이다. 간절히 기다리고 또 기다리던 보고였다.
2개월가량의 수색전과 추격전 끝에 적의 주력을 완전하게 포착한 것이다. 어떻게 공격하여 섬멸하느냐가 남은 문제였다. 공격에는 정면공격과 우회공격이 있다. 정면공격은 앞에서 말한 대로 불리하다. 아군의 희생을 전제로 해야 한다. 우회공격을 하려면 1천 미터에 가까운 순령을 넘어야한다. 심사숙고 끝에 우회공격을 하기로 했다. 그러려면 그들이 숨어있는 거림리 동쪽 계곡을 올라가서 약 8백 미터의 산등을 넘어 또 다시 산 능선을 거슬러 올라가 적의 후방을 차단하는 공격방법 외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주둔지에서 저녁을 충분히 먹고 출발했다. 도중에 작은 부락이 있는데 그곳에서부터 거림리까지 직선거리로 약 1킬로미터 남짓했다. 수색대를 보내어 그곳에서 기르는 개를 모두 아래로 끌고 왔다. 그리고 동네사람들이 방밖으로 나오는 것을 통제했다. 이것은 우리가 지나갈 때 개가 짓거나 동네에 숨어있는 적의 프락치를 사전에 예방하기 위해서였다.
3개 중대는 간격을 두고 은밀히 이동했다. 눈이 무릎높이까지 쌓여있고 경사가 심해서 산을 오르기가 매우 힘들었다. 새벽녘에 능선에 도달했다. 뒤를 돌아보니 동쪽하늘은 붉게 물들어있었다. 능선을 따라 중대를 계속 올려 보내고 대대 OP는 그곳에 설정했다. 날이 완전히 밝았다. 내려다보니 동구 앞 큰 바위 위에 공비보초 두 명이 서있었다. 다른 몇 놈은 동내 앞 광장에 모여앉아 모닥불을 지피고 있었다. 긴장한 분위기는 아닌 듯 했다. 직선거리로는 약 8백 미터 정도였으나 나의 등 뒤로 아침 해가 눈부시게 솟아올라와 그들이 나를 발견하기는 불가능했다.
80밀리 박격포와 50밀리 기관포를 조준해놓고 중대에서 연락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잠시 후 무전기에서 중대장의 목소리가 들렸다. 예정된 위치에 도착했다는 보고였다. 나의 발사명령에 박격포가 발사되었다. 기관포는 얼어붙어 발사가 안됐다. 박격포 탄이 광장에 나와 있던 공비들을 명중시켰다. 다른 공비들은 혼비백산해 마치 개미들처럼 흩어져서 산 위쪽으로 도망을 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잠복하고 있던 중대에서 총성이 들려왔다. 중대장으로부터 “적 발견! 공격 개시!”라는 보고가 연달아 들어왔다. 나머지 일 개 중대와 대대본부는 마치 눈사태라도 난 듯 그 부락을 향해 돌진했다.
산 위로 올라올 때는 하룻밤을 꼬박 걸었는데 내려갈 때는 한 시간도 안 걸린 듯하다. 부락에 도착했다. 광장에는 모닥불만 무심히 타고 있었고 공비의 시체 6구와 M1 소총 5정이 나동그라져있었다. 나머지는 도망갔다. 그 때 부락 안을 포격했더라면 좀 더 성과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양민이 다치고 오막살이도 불에 탈 것이라서 의도적으로 부락의 건물들을 피해서 사격을 한 것이다. 지리산에는 유서 깊은 대사찰들이 있다. 국보급인 내원사가 먼저 있던 하 대위 부대에 의해서 불에 타고 말았다. 이런 실수를 어떻게 보상할 것인가? 산골짜기의 단칸 초가집도 우리 양민들의 보금자리다. 그 보금자리를 불 태워 파괴할 수는 없었다.
공비들의 시체 외에 이 동네사람들이 집 밖으로 내놓은 것이 있었다. 가구와 침구들이었다. 공비들이 이런 것들을 가져갈 이유가 없기에 부락사람들에게 물어보니 국군이 들어오면 집에다 불을 지른다고 해서 가재도구를 미리 꺼내놓은 것이라고 했다. 다시 한 번 민심 수습의 절실함을 통감했다.
산사의 승려들이 짊어지고 다니는 바랑도 몇 개 굴러다녔다. 공비들이 절에서 약탈한 것들이었다. 부락에서 약탈한 의류나 곡식을 담아 다니는 배낭처럼 사용한 듯 했다. 삼다가 버리고 간 짚신도 여러 짝 흩어져있었다.
한 집 방문을 열고 들여다보니 어두컴컴한 구석에서 누군가가 웅크린 채 신음을 하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15, 6세 정도 되어 보이는 소녀가 거의 실신상태로 쓰러져있었다. 군의관을 불러 응급조치를 해주었더니 정신을 차린 소녀는 공비들이 수도 없이 겁탈을 했다고 힘없이 울먹였다. 소녀는 아랫동네 친척집으로 피신하고 있었는데 자기 집에 식량을 가지러 왔다가 미처 빠져나가지 못하고 끔찍한 일을 당했다는 것이다. 인면수심 천인공노할 만행을 나는 목격했다.
잠시 후부터 전과가 속속 보고되었다. 종합전과는 사살 32명, 포로 38명, 기관총 및 소총 40여 정, 기타 의류와 식료품 등이었다. 포로 중에는 그 이름도 유명한 지리산 지구유격대 부사령관 지창수가 있었다. 그는 약간의 부상을 입었으나 건강했다. 그는 평양에서 파견되어 경비대에 잠입해 상사까지 되었다. 사령관 노 씨를 놓친 것이 애석했지만 어찌하겠는가. 공비졸개들은 거의가 14연대 사병출신들이었다. 장교인 김지회와 그의 처 조경순 그리고 참모장격인 홍순석도 놓치고 말았다. 그러나 총원 130명 중 사살과 포로가 70명이었고 무기도 노획해서 공비의 세력은 절반이하로 줄어들었다. 무엇보다 의미가 있는 것은 지리산에 공비가 침투한 이래 최초의 토벌작전이었고 막대한 전과를 올렸다는데 있다.
그 날 정오까지 능선과 계곡을 따라 추격했으나 계곡주변으로 산 위에서 내려온 발자국은 있으나 올라간 흔적은 없었다. 서편 절벽을 타고 도주한 듯 했다. 나는 일단 돌아가기로 했다. 주둔지 상청으로 오니 여단장과 연대장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나의 경과보고를 듣고 나서 작전의 절묘함을 격찬했다. 후 일 상부로부터 표창장도 수여되었다.
그 후 서너 차례의 공격이 더 가해졌고 소귀의 전과도 있었다. 나머지 공비 16명이 지리산 서부 달궁지구에서 3연대 1대대 하 대위에게 포착되어 김지회는 행방불명되고 그의 처 조경순은 생포, 홍순석은 사살되었다. 이와 더불어 지리산 지구 공비들이 완전소탕된 것이다.
그 때가 5월 초였다. 나는 부산으로 돌아갔다. 부산시민이 총동원되다시피 하여 환영을 해주었다. 그리고 웃을 수 없는 사실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3월 1일 부로 소령에 진급되어 있었지만 토벌작전 와중이라 명령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은 것이다. 2개월 남짓 계급을 손해 본 셈이다. 시가행진을 하는데 제법 자란 큰아들 녀석이 대열로 달려 들어와 아버지를 부르며 매달리는 바람에 졸지에 웃음바다가 되어버리기도 했다.
5개월에 걸친 지리산 공비 토벌작전도 대단원의 막이 내려졌다. 겨울 빙한기에 산악의 밀림지역에서 고생은 많았지만 배운 점도 많았다. 이상은 중요한 사건만 간추려 설명한 것에 불과한 것이고 더 많은 일들이 있었다.
허리까지 올라오는 눈에 쌓인 산속에서 헤매다보니 다리에 관절염이 생겼다. 다행히도 고문관이 좋은 약을 구해주기도 하고 당시 경남지사 이익홍 씨가 금보다 귀하다는 개소린(?)을 몇 드럼 내주어서 날마다 동내온천에 가 요양을 할 수 있었다. 그 덕에 다리의 상태는 완쾌될 수 있었다.
지금도 잊지 못할 이야기가 있다. 나의 가냘픈 목에도 두 번이나 현상금이 걸렸었다. 첫 번째는, 지리산 공비 홍순식을 사살하고 그의 호주머니에서 나온 수첩에 기록된 내용을 보면 5연대 임익순 대위를 사살하면 50만원을 준다는 것이었다. 다른 하나는 19연대장 시절 화천 북방에서 작전을 펼치고 있을 때였다. 사단장이 부르기에 갔더니 전선에서는 보기 드문 사복차림의 남자 두 사람이 와 있었다. 인접 사단의 특무대장과 얼굴이 낯설지 않은 우리 사단의 특무 대장이었다.
그들의 말에 의하면 적의 첩자를 한 놈 생포해서 심문한 결과 그의 임무가 6사단 19연대장 임익순 대령을 암살하거나 생포하는 임무를 띠고 침투했다는 것이다. 그 자는 내가 묵고 있는 지점의 약도까지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니 신변보호에 특별히 주의하고 명찰도 가명으로 부착하고 다니라는 통보였다. 이렇게 나도 두 번이나 공산당의 숙청대상이 된 적이 있었다.
내가 지리산에서 토벌작전을 수행하고 있을 무렵 육군에서는 대대적으로 숙군을 감행하고 있었다. 내가 서울 병기중대에 있을 당시 대대장이던 안기수 소령이 걸려드는 바람에 애꿎은 나의 후임중대장들과 기타 그 휘하의 여러 장교들까지 소환되어 심한 조사를 받았다고 한다. 내가 만약 그곳에 있었다면 나 역시 예외는 아니었을 것이다. 그곳에서 사전에 떠나와 지리산에서 고생은 했지만 내 개인에게는 전화위복이 되었고 천우신조라고 할 수 있다.
그 해 여름 온양으로 연대가 이동했다. 특별한 임무 없이 병기 등을 정비하고 보충훈련을 하며 모처럼 여유 있는 일상이었다. 하루는 몹시 더운 날씨였다. 우리 정부의 장관 몇 분이 미국대사인 무초 씨와 예고도 없이 온양으로 들이닥쳤다. 당시 국방장관인 철기 이범석 씨도 오셨다. 대천 해수욕장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온천욕을 하려고 들렸다는 것이다. 철기장관이 묵으시던 온천호텔를 방문했다. 당시에는 호텔이라고 해도 선풍기 한 대 없는 열악한 수준이었다. 장군께 부채를 권했더니 고맙다고 하시며 일단 받으시더니 옆에 살짝 내려놓으셨다. 당신은 평생 부채질 한 번 한 일이 없고 앞으로도 부채질을 하지 않을 것이라고 조용하게 말씀하셨다.
나는 그 때부터 부채질을 하지 않는 습관이 생겨 60세가 넘도록 까지 지키고 있다. 그 때 그 분은 장교는 모름지기 부하 앞에서 사표가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군대에서 흔히 듣는 말이었지만 유난히 심금을 울리는 한 마디였다.
그 해 늦여름이라고 기억한다. 서울에 올라갔다가 청운동 이시영 부통령을 예방했다. 마침 다음날 온양에 내려가신다면서 동행하자고 하셨다. 시간에 맞춰서 서울역으로 나갔다. 급행열차에 특별객차를 연결해 출발했다. 천안역에는 많은 환영객들이 모여들었다. 온양에 도착해 당시 충남지사의 사제에 숙소를 정하고 다음날 예장 저수지 준공식에 참석하신다고 하셨다. 그 날 특별경계를 했고 행사 때도 물샐 틈 없이 경비를 해드려 무사히 행사가 치러졌다. 충남지사와 경찰국장이 찾아와 경비에 대한 감사의 말을 전했다.
온양의 유지들, 기관장들과도 매우 친숙해졌고 협조도 잘되어 마음이 편했는데 갑자기 대전 비행장으로 이동하라는 명령이 떨어져 또 다시 짐을 싸야했다. 11월 날씨가 매우 추울 때였다고 생각난다. 연대장도 백남권 중령과 교체되었고 제 2사단에 예속되었다. 사단장은 송호 장군이셨다. 인사차 예방했더니 반가워하시며 연대장을 잘 보좌하고 부하를 잘 지도하라는 늘 하시는 말씀을 하셨다. 어찌하다 고문관 이야기가 나오자 몹시 흥분하시며 중국에서도 그 놈들이 나라를 망치더니 또 우리나라에 와서도 그런다고 하셨다.
나는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잘 몰랐다. 그 당시 흔한 커피를 안 드시고 어디서 구했는지 우리 고유의 녹차를 대접해 주셨다. 그 무렵 군용자동차가 여유 있게 보급되었다. 송장군은 미국이 우리를 위해서 자동차를 주는 게 아니고 휘발유를 팔아먹기 위해서라고 비난했다. 나도 깨우친 점이 있어 자동차는 가급적 세워두고 근거리 보급품 운반 등은 마차를 이용했다.
그 때 백 연대장이 일군학병 출신이어서인지 횡포가 심해 못마땅하게 여겨 거리를 두고 있었다. 사단 참모장의 호출이 있었다. 급히 달려가 보니 지금의 사단장이 경북 영덕에 계시고 당신을 즉시 그리고 오라고 하신다고 말하며 그 곳에 있는 25연대로 전속을 명했다. 그러면서 그 곳 김달삼 일당의 공비잔당의 토벌에 난관이 있는 것 같다고 귀띔을 해주었다. 부산에서 대전으로 이사 온 가족과 함께 지낸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또 작별을 하게 되었다. 나는 이렇게 5연대를 떠났다.
15. 동해안 (안동지구 토벌작전)
안동 25연대본부에 도착한 것이 1949년 12월 15일었다. 연대장은 중국 임정 출신으로 온화하고 점잖은 신사형인 유해준 중령이었다. 나는 1대대장에 보임되고 곧바로 1백여 킬로미터를 단숨에 달려 동해안 영덕에 도착했다. 대대본부에 도착하니 사단장 송호 장군이 그 지방 군수와 서장 등 기관장들과 지방 유지들을 모아놓고 환담을 나누며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사단장에게 보직신고를 했다. 문자 그대로 호랑이 눈 같은 매서운 눈으로 나를 한참 노려보더니 “우리국군에서 최고의 공비사냥꾼이 왔소!”라며 나를 좌중에 소개했다. 나는 그에 대한 답으로 “지금 말씀은 과찬이시고 아직 약관이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앞으로 성과는 여러분의 협조에 달려있습니다.”라고 인사했다.
내가 갑작스럽게 그쪽으로 보내진 이유는 그곳의 공비토벌작전이 지지부진해서 전과가 없는 반면 민간인의 피해가 심했기 때문이었다. 전임 대대장의 작전에 착오가 있었다고 하면 실례가 될 수도 있으나 사실이 그랬다. 그곳으로 달려간 사단장의 진노는 대단했다. 작전실태를 보고받자마자 “대전사단본부에 있는 임익순 소령을 즉시 그곳으로 보내라!”고 명령하고 내가 도착할 때까지 앉은자리에서 꼬박 밤을 새며 기다렸다는 것이다. 지방기관장과 유지들에게 “당신네 고장의 안전을 위한다면 대대장을 적극적으로 지원해주시오.”라는 당부를 남긴 사단장은 홀연히 방에서 나가셨다. 나는 그 분을 책임경계선까지 배웅해드리고 대대로 돌아왔다.
대대 장병들은 우수하고 유능했다. 중대장 가운데에는 후에 월남파병 때 파병군 사령관이 된 채명신 대위도 끼어있었다. 초면이었지만 대단히 믿음직스러웠고 대유격전의 원칙 등을 자세하고 철저하게 교육시켰다.
한 번은 지금은 고인이 되신 당시 톱가수였던 고복수 씨가 나를 찾아왔다. 그에게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 나의 대대에 있다는 것이다. 아들을 면회하기 위해 방문한 것이다. 아버지를 닮아 노래솜씨가 훌륭한 그의 아들은 의무대에서 위생병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나는 고복수 씨에게 아들 면회도 좋으나 우리 장병들도 위문해 줄 것을 당부해 그날 밤 시냇가 모래사장에서 계획에 없던 오락시간을 갖게 되었다.
고복수 씨와는 남다른 인연이 있었는지 6.25전쟁이 한창일 때 평안도 묘향산 근처에서 인민군에게 끌려가는 그의 일행을 구출하기도 했다. 그들 일행에는 황금심, 최은희, 김화자 등 당대 최고로 유명한 가수와 배우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나의 부대가 당면한 적은 제주도에서 4.3사건을 일으킨 김달삼 등 잔존 공비들이었다. 그들은 용케도 바다를 건너와 태백산맥을 거슬러 북으로 넘어갈 계획을 하고 그 부근까지 올라온 것이었다. 그 수가 약 30명이나 대부분이 이북에서 게릴라전을 익힌 자들이었고 공산당 골수분자들이었다. 제주도에서 출몰하다가 이곳까지 흘러들어온 무시해선 알 될 위험한 자들이었다.
태백산맥 중머리인 거봉준령과 심산유곡은 그들이 은신처로 삼기에 적합한 곳이었다. 주왕산을 중심으로 이어진 연봉들은 거의가 1천 미터를 넘는 험악한 바위로 이루어져있고 밀림이 빽빽한 지형이었다. 그런 지형에서는 산을 하나 넘고 깊은 골짜기를 건너는데 하루 종일 시간이 걸린다. 공비들은 이런 지형적 특징을 고도로 이용해 산골과 해변까지 침입해 양민을 학살하고 물건들을 약탈하며 주요 기관에 방화까지 저질렀다.
산간벽지의 주민들은 선조대대로 타를 잡고 살던 고향을 버리고 산을 내려와야 했다. 그래서 산골짝에는 사람이 살지 않는 죽음의 유령부락이 늘어났다. 결국 공비들의 활동범위는 더 넓어지고 자유로워졌지만 우리 편에서는 그들에 대한 정보가 없어 답답하기만 했다. 텅 빈 부락에 그들이 들어가서 살아도 알 길이 없고 약탈한 벼를 부락 방앗간에서 정미를 해가도 알 길이 없었다. 부락들마다 벽에는 붉은 벽보가 수도 없이 붙어있고 인공기가 백주에도 펄펄 나부끼는 상황까지 되었다. 겨우 30명가량의 공비가 이리도 광범위한 지역에서 활동할 수 있는지가 의문이었다. 나는 동조자들의 소행이라고 단정할 수밖에 없었다.
한 편 소도시나 조금 큰 규모의 부락에는 그들을 동조하는 세력이 적지 않게 깔려있었다. 우리 군이나 관계당국에서 선무공작에 너무 소홀했기 때문이었다. 조금 깊숙한 위치에 있는 경찰지서는 마치 무슨 요새처럼 되어있고 경찰들 역시 한 발자국도 밖으로 나가지 않고 있어 주민들은 일 년 내내 순경이나 면서기를 길에서 마주친 일이 없다고 했다.
이러한 실태를 직접 확인한 송호 사단장의 마음이 편할 리 없었을 것이다. 나는 현황을 파악하고 작전을 구상했다. 우선 공산유격대를 분석했다. 빨치산(유격대)과 인민은 물고기와 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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