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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 24-03-22 03:36 조회 1,904 댓글 0본문
1. 좌파교육이념이 실패하는 이유
이상적인 사회를 지향하는 과정에서 교육의 중요성이 절대적임은 새삼 강조할 필요가 없다. 교육이념에 따라 교육의 세부목표와 내용, 교육방식 등도 자연히 영향을 받게 된다. 지금껏 독일교육계에서 관심의 초점이 된 사안은 ‘엘리트’ 개념이었다. 투쟁의 논리가 지배하던 100여 년 전부터 시작하여 통일 후인 10여 년 전까지 엘리트 개념은 독일사회에서 부정적인 의미로 인식되어 전적으로 거부되어 왔다. 그 직접적인 원인으로는 히틀러의 국가사회주의 (Nationalsozialismus) 하에서 벌어진 범죄행위에 독일의 엘리트층이 다수 동조 협력했던 사실을 꼽을 수 있다. 권력 엘리트 형성 계층이 국가의 불행을 가져 온 주체가 된 것이다.
미국은 물론 영국, 프랑스에서도 엘리트교육이 제도화되고 있는 점과 비교해 보면 독일의 경우는 극히 예외적인데, 엘리트 의식은 히틀러 시대의 유물인 ‘반 민주적 사고’ 에 대한 거부와 같은 맥락이어서 설 자리를 잃었다. 당시 독일사회의 핵심 이슈는 민주주의와 평등의식이었으며 엘리트는 이와 대립되는 의미로 받아들여진 것이다. 일상적인 용어 사용조차 완전히 터부시 될 정도였다. 그러나 이데올로기 논쟁의 종말과 함께 서서히 변화가 시작되었다. ‘엘리트’ 는 사회적으로도 부담 없는 어휘로 자리 잡았고 민주주의와 엘리트는 더 이상 배타적인 개념으로 해석되지도 않았다. 글로벌 경쟁시대의 도래도 이러한 변화에 박차를 가하였다. 독일 교육계는 최근 들어‘엘리트’개념을 서슴치 않고 사용하게 되었고, 정부 역시 엘리트 대학을 육성하겠다는 의지를 명백히 하고 있다. 단지 엘리트라는 개념의 진정한 의미를 무시한 채 오히려 개념사용을 남발하고 있다는 느낌이다. 외국의 엘리트 대학과 같은 수준의 대학을 잉태하기에는 아직 기본조건이 형성되어 있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정부가 엘리트 대학 육성을 추진하려는 의지를 표명했다는 사실만으로도 독일로서는 패러다임의 변화를 이룬 장족의 발전으로 볼 수 있다. ‘엘리트’ 개념 못지않게 독일교육계에 부정적 역할을 끼친 이념이 ‘평등주의’ 이다. 이는 좌파이념의 핵심이기도 하지만 이미 독일교육계에 오래도록 뿌리내려 있는 전통에 속한다. 교육에서는 ‘평준화’ 로 나타나는 평등의식은 학력수준을 저하시키는 요소이기도 하다. 독일사회에서 ‘경쟁의식’ 에는 부정적인 고정관념이 박혀 있으며, 경쟁을 통한 서열화보다 평등이 우위에 서야 한다는 고정관념이 유지되어왔다. 현재 독일교육계에서는 평준화로 인한 여러 현상들이 나타나고 있다. 대표적 사례로서, 대학교수직은 공무원 직으로 분류되어 업적에 따른 급료수준의 차등화가 없다. 전국적으로 모든 대학이 동일한 수준에 머물러 있다는 점도 하향평준화의 결과이다. 또한 전국 단위의 수능시험이 도입되지 못하고 있는 것은 경쟁의식의 결여로 인한 교육계의 나태성의 표현이기도 하다. 대학입학 제도 역시 모순이 크다. 한 예로 고졸점수 미달로 인해 의대 입학이 안 되는 학생이라도 시간을 보내며 기다리면 결국 입학자격이 주어진다. 부족한 학력을 뒤늦게 보충할 필요도 없이 내 차례가 오기를 기다리면 순번에 따라 입학이 가능해지는 희한한 제도 때문이다. 대개 2, 3년간 병원에서 실습생으로 귀중한 세월을 보내고 있다.
다른 사례도 있다. 지난 학기 독일에서 고졸점수 0,7 이라는 전국 최고기록으로 졸업한 학생이 있었는데 그는 하이델베르그 대학 의대에 낙방했다. 1.3 같은 좋은 점수대의 지망자가 많아 일괄적으로 추첨을 한 결과 추첨 운이 부족했던 것이다. 평등사회의 불합리한 단면이다. 독일통일 이전의 동독과 서독의 교육계를 보아도 여러 모로 특징이 나타났다. 모든 분야에서 평등주의를 내세웠던 동독의 경우, 학자들 간에는 경쟁 없는 동일 수준의 봉급체계를 통해 지적 능률 및 평가의 균일화를 이루었다. 이런 상황에서 동독대학이 성과를 낸 유일한 분야는 대학교재 집필이다. 이들이 서독 모든 대학에서 채택할 정도의 좋은 교재를 만들어낸 것은 자기 연구분야에서의 개인적 노력보다 집단작업에 의존한 전형적인 하향평준화의 결과로 보인다. 또한 통독 후 밝혀진 바에 따르면 동독대학들은 서독에 비해 40%의 과잉 인원을 고용하고 있었다. 사회 전반에서 능률과 경쟁을 염두에 두지 않은 결과였다. 이런 교육의 문제 외에 물질적 생산과 소비의 수준에서도 동독정권은 고품질의 승용차 개발을 독려하고 생산 허가하는 대신 거의 원시적인 수준의 2기통 승용차 생산만을 허가했었다. 승용차의 대중적 보급에 어느 정도 기여했을 수는 있으나 장기적으로 기술개발과 사회 발전을 억누른 평등정책일 뿐이었다. 무경쟁으로 인위적인 평준화가 이루어진 사회가 결국 창의력을 잃은 나태하고 침체된 사회로 변질되는 과정은 그 어디보다 공산권에서 표면화된 것이다. 이는 비단 교육계뿐 아니라 기업과 사회전반에 걸친 문제였다는 점에서, 인간이 품고 있는 이상향과 인간본성 사이에 나타나는 모순의 표출이라고 보여진다. [유럽리포트*2009]
2. PISA 결과에 해결방안이 없다
독일은 PISA 히스테리에 병든 나라라고 한 교육자가 평을 한 적이 있다. 이제는 그 정도 수준을 넘어 PISA라는 단어 자체가 패러다임의 전환이라는 의미를 갖게 될 것이라는 예견도 있다. 도대체가 전 세계적으로 독일만큼 PISA에 관심이 많고 그 결과를 절대적으로 신뢰하는 나라도 없다고 한다. 모든 교육문제에서 으레 PISA 없이는 의견개진이 되지 않을 정도다.
왜 유독 독일만이 그렇게 신경과민적 반응을 보이고 있을까? 학교에서 실력평가를 위한 점수 매김이라든가 서열 매김에 심한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던 독일인이 이렇게까지 PISA 결과를 중시하게 된 데는 이유가 있다. 6년 전 1차 PISA시 시험문제가 아시아식의 암기 위주가 아니고 이해력위주의 문제였다는 결론을 얻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물론 더 큰 배경은 독일학제는 더 이상 개선을 요하지 않을 정도의수준이라고 확고히 믿고 있었기 때문에 그만큼 쇼크도 컸던 것이다.
이번 발표된 첫 시험은 Iglu. 초등 4년생 대상으로 읽기와 독해력의 테스트였다. 수년 전보다 서열이 올랐다고 기뻐했다. 더욱이 최상급순위를 차지한 소련, 캐나다 등에서는 아동 가운데 8% 정도를 테스트에 참여 시키지 않았다. 성적을 올리기 위해 국가가 행한 부정행위였다. 독일에서는 정신박약아, 외국출신 이주자 등 0.7%를 제외시켰다. 또한 미국, 네덜란드, 영국 등에서는 학생들에게 현금을 주면서 이 테스트에 참여하도록 종용했다는 것이다. 독일에서는 참가자에게 PISA라고 박혀 있는 기념 볼펜을 나누어 주었다. 그만큼 학생들의 무관심이 컸었나 보다.
과학 분야에서 15세 고교생은 3년 전 중간층에서 이번에는 상위 25%에 올랐다며 경사 분위기였다. 그런데 시험문제가 독일학생들이 강한 환경문제에서 주로 출제되었다는 보도가 뒤따랐다. 이러한 내막을 폭로한 독일인 학자는 PISA 수험 OECD 담당관이다. 이 발표에 대한 독일 측의 분노감도 예외적이었다. 당장 파면을 요구하고 나섰다. 독일이 PISA에 대해 그만큼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다는 방증이다. 수학에서는 3년 전과 큰 차이가 없이 중간 정도에 머물렀다.
3년 전 PISA 이후 교육현장에서 어떤 변화가 있었나하는 질문이 나왔다. 답변은 수 없는 토론과 교사들의 연수를 강화했다는 정도였다. 학생들은 변화를 느끼지 못했다는 답변이었다. 그렇지만 일반적으로 긍정적인 변화가 있었다면 학생들이나 학부모들의 교육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었다는 것이다.
학생들의 성취도보다 더 당황하게 하는 점은 사회 하위층 자녀들과 상위층 자녀간의 실력격차가 유별나게 심하다는 점이다. 바로 이 문제는 좌파에서 가장 중시해온 기회균등의 핵심문제이며 70년대의 교육제도 개혁안도 바로 이 기회균등에 초점을 맞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이제 30년이 지나 PISA라는 외부적인 압력에 의해 비로소 이 제도의 허점을 인정하고 갈팡질팡하고 있는 교육계이다.
OECD 등의 전문가들이 말하는 개선책으로는 진학 학교를 성적별로 세분화하는 현재의 제도보다 모두가 동일한 학급에서 수업을 받도록 하며 전일제를 추진할 것을 제안하고 있다. 정부는 이보다 교사의 질적 향상에 더 큰 비중을 두고 있다. 성적별로 세분화하지 않는다면 이는 바로 40년 전 개혁정신을 역행하는 것이다. 하층 학습능력 부진자를 지원하기 위해 수준별로 분류했었기 때문이다. 어쨌든 단적으로 말해서 교육계는 뚜렷한 묘안을 찾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 한국인의 시각에서 볼 때는 오히려 이 문제에 명확한 해답이 나온다고 생각된다. 독일에서는 5, 6학년에서 하루 숙제는 1시간 내에 끝낼 수 있는 분량으로 한다는 주 문부성 지시가 있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하향평준화로 가는 표본적인 본보기일 것이다.
그렇다면 부모가 가정에서 교육에 도움을 줄 수 있는 상류층 아동과 어쩌면 학교라고는 다녀보지도 못했을 외국인 학부모를 둔 아동이 집에서 숙제를 마친 후 어떤 방법으로 여가시간을 소비를 할 것인가에 대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고답적인 이념에 의지해서는 풀릴 수 없는 수수께끼이다. 그래서 이 문제에 대해 독일 교육계는 구체적인 해결책을 제시하지 못한다. 그들은 침묵을 지키고 있을 뿐이다.
사회적 불평등을 감소시키기 위해서는 누군가가 열정적으로 하층사회 아동들을 돌봐 주는 방법밖에 해결책이 있을 수 없다. 그러나 이러한 이상적인 목표에 자기 여가를 희생할 교사는 70년대에도 아무도 없었다. 국가에는 재정적 여유가 없다. 그렇다고 한국에서는 흔한 학원도 대중화되지 못하고 학습참고서도 없고 학습 TV도 없다. 학생들에게는 그만한 열의도 부족하다. 최근 마인츠시에서 학부모에게 설문한 바에 따르면 고등학교를 보내겠다는 학부모는 50% 정도였다. 노력으로 현재 나의 신분을 탈피하겠다는 의욕이 부족한 것이다. 따라서 공립학교를 신뢰할 수 없는 학부모들은 학교성적이 부진하고 경제력이 허용하면 사립학교로 떠난다.
이제 기회균등을 목표로 이상형이라는 교육개혁을 실행했던 60년대 학자들은 모두 교육현장을 떠났다. 이 어려운 고비를 어떻게 이겨나갈 수 있을지 매우 난감한 상황이다.
[유럽리포트*2008]
3. PISA 결과가 갖는 의미
2000년, 첫 PISA(학업성취도평가) 테스트 결과가 발표되었을 때 독일사회는 전에 없던 큰 쇼크로 받아들였다. 평균치에도 훨씬 못 미치는 바닥권이었다. 그래서 아직도 독일 언론의 PISA에 관한 기사는 의례히 ‘PISA 쇼크‘로 시작되고 있다. 이 성적이 독일에는 너무나 뜻밖이었기 때문이다. 즉 독일은 그간 성취한 교육제도에 대한 자신감과 자만에 빠져 있었다. 특히 70년대부터 불붙은 좌파 편향운동은 교육과정의 개혁방향에 있어 절대적인 영향을 끼친 것이다. 잘 알려져 있듯이 이들은 경쟁이나 엘리트 의식을 억눌렀고 한 걸음 더 나아가 학업평가를 위한 학과시험 폐지를 주장했다. 집에서 하는 숙제도 원치 않았으며 오후에 교과서를 집으로 가져가는 것에도 반대했다. 모든 학생이 동등한 조건하에서 수업을 받아야 한다는 인식이 저변에 깔려있기 때문이다. 이는 인간평준화로 향하는 전제조건이었다. 이 결과가 수 십 년 후 PISA에 나타난 것이다. 그런데 좌파교육에서 나타나는 이런 경향의 분위기가 아직도 이어지는 지역이 있다. 이틀 전 함부르크 녹색당은 교육에 관한 몇 가지 요구사항을 제시했는데 고교생들의 숙제를 폐기할 것을 요구하고 나선 것이다. 그리고 학생들의 부담을 덜어준다는 이유로 필기시험 수는 1주 2회로 제한할 것을 요구했다. 시대착오적인 행태로 보이는 이 내용을 게재하는 언론은 아마도 ‘웃기는 기사’ 정도로 받아들인 듯하다. 이번 PISA 결과에서는 독일이 OECD국가의 평균성적을 넘어섰다고 긍지가 대단해 보인다. 그래서 이제는 ‘PISA 쇼크’가 아니고 ‘PISA 발전(Fortschritt)’ 으로 호칭을 바꿀 수 있겠다는 제안도 나왔다. 지난 10여 년간 독일에 생겨난 과외학습이 역할을 한 만큼 학부모들의 교육열도 상당한 수준에 이른 것으로 보인다. 이번 결과에서 석연치 않은 점도 있다. 그것은 모든 분야에서 1위를 차지한 중국 상하이 학생의 성취도이다. 상하이라면 기업의 중심지로 자연히 경제적으로 여유 있고 학생들도 수준이 높을 것은 당연하다. 한국에 비유한다면 마치 서울의 우수한 일부 구역을 한국의 대표인양 내놓은 것이다. 일개 도시만을 국가대표로 격상시킨다는 독선이 불쾌감을 자아내게 한다. 그러나 이보다 더 문제시해야 할 점은 과연 이 평가가 공정한 조건하에서 이루어졌을까 하는 의문이다. 1차 PISA 시에는 유럽에서는 네덜란드, 스페인 등 몇 개 나라와 아시아지역에서는 인도네시아 등 총10여 개 나라가 부정행위에 참여했는데 이 사실이 공식적으로 공표되었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그다음부터는 부정행위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다는 것이 기이하다. 가장 간단한 부정행위는 평가하는 날 성적이 낮은 학생을 참석하지 않도록 하는 방법이다. 이는 2000년도 첫 번째 테스트에서도 이용된 수단이며 수 일전 슈피겔 지에 게재된 관련기사에도 당연하다는 듯이 이 방법을 언급하고 있었다. 또 여기에는 감시 억제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 과거 PISA 평가가 발표되었을 때 한국 성적은 이번 2012년보다 더욱 높았으며 과목마다 1, 2위를 차지하곤 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국내 전문가들이 거의 무관심한 정도의 반응을 보인 것은 확실히 기이한 현상임에는 틀림없다. 이번 발표된 결과에서는 상하이와 2위국가간의 현격한 차이가 너무 놀라울 정도다. 아마도 첫 번 참여에 부정을 하다 보니 경험부족으로 인해 한계를 정확히 책정하지 못한 것은 아닌가하는 생각이 든다. [유럽리포트*2009]
4. 대학가의 알력
10년 전 독일 대학제도는 전통적인 Diplom을 벗어나 국제규격에 알 맞는 뱃첼러 제도를 도입했다. 이 개혁의 주요 동기는 교육기간이 긴 디플롬 제도 폐지로 수업연한을 단축시킴으로써 국제경쟁력을 높인다는 데 있었다. 그런데 개혁 이후 한 가지 부작용이 나타났다. 뱃첼러 제도의 도입으로 인해 4년제 전문대학(Fachhochschule)과 종합대학이 수여하는 학위의 명칭에서 차별화가 사라진 것이다. 명칭뿐 아니라 각 과정의 수업연한에서도 차이가 전혀 없게 되었다. 논란을 빚게 된 것은 전문대학이 종합대학과 같은 수준에서 박사학위 수여권한을 요구하고 나선 것이다. 원래 전문대학은 수 적으로도 적었으며 입학자격은 일반대학에 비해 한 단계 낮았었다. 고교졸업이 필요요건이 아니었다. 그러나 요즘은 거의 전원이 Abitur를 가진 고교졸업생이 되었다. 마찬가지로 일반대학에도 이제는 고교졸업증 없이도 실무경험 등을 통해 졸업증을 대신할 수 있다. 이 특혜를 이용하는 인원은 많지 않고 대학과정에서 성공률은 높지 않지만 변화의 추세는 확연하다. 두 개의 다른 명칭을 가진 대학과정 간에 모든 분야에서 점차 차별화가 사라져가고 있는 것이다. 단지 수준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전문대학은 실용적인 학과에 그리고 일반대학에서는 기초학문과학에 무게를 두고 있다는 사실이다. 근래 일부 정부 문부성은 전문대학에서도 박사학위 수여권한을 부여하겠다는 뜻을 명백히 했다. 그러나 이에 대한 일반대학 측의 반응은 격렬했다. 독일에는 9개의 일반 공과대학이 TU 9’(Technische Universitaet 9)이라는 연합을 형성하여 자신의 이익을 대변하기 위한 단체로 이용하고 있다. 일반 공대가 전문대의 박사과정도입에 과격하게 반대하는 데는 독일학계의 불편한 심기가 깔려있다. 최근 여러 독일대학에서 박사논문 표절사건이 연이어 폭로되면서 이로 인해 독일학계가 받게 될 외국의 평가는 곤혹스러운 것이 확실하기 때문이다. 알려진 표절사건은 예외 없이 정치인이었으며 인문사회계열에서 일어난 사건이었다. 이것이 대외적으로 독일대학의 학문적 수준이나 학위과정에 대한 평가에 부정적으로 작용할 것은 당연한 것이다. 또한 이공계 교수의 연구비 여건을 보면 일반대학에서는 1명 교수가 42만 유로를 보유하고 있는 반면 전문대에서는 13만 유로 정도다. 이런 조건하에서 전문대학이 박사과정을 도입한다면 외국에서는 독일대학이 박사학위를 양산하려는데 대해 이를 아무도 이해하지 못할 것이라고 TU 9 대표는 강조했다. 만약 전문대학의 박사과정이 일반대학과 공조 하에서만 가능하다면 결국은 전문대는 일반대학에 종속되는 기이한 결과를 낳게 될 것이라는 우려의 목소리도 있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박사학위의 가치를 떨어트리게 될 것이라는 지적이다. 또 독일대학위원회는 전문대에게 박사학위수여 권한이 허용된다면 이는 막스 플랑크 연구소나 기타 대학 외 연구기관이 학위 수여권을 요구 시 이를 거부할 수 없을 것이라고 독일대학위원회는 언급했다. 독일 의과대학에서는 전통적으로 박사란 거의 모든 학생이 박사논문을 쓰는 형식에 지나지 않는다. 자칫 공과대학에 박사 인플레 시대가 오지 않을지 주목된다. [유럽리포트*2012]
5. 교육 하향평준화의 길?
독일교육계는 전 후 교육제도에 관한 한 자신만만했다. 이는 아마도 다른 나라의 교육제도 및 외국학생들의 학업성취도와 직접 비교할 수 있는 기회가 전혀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독일 내부적으로도 교육의 성취도를 비교하며 랭킹을 따지는 행위는 용납되지 않는 분위기였다. 특히 60년대 말부터는 사회의 좌경화 물결에 휩쓸려 교육의 방법론은 여러 각도에서 실험대상에 올라 혼란스러웠다. 여기서 교육계에 처음으로 쇼크를 준 것이 10여 년 전 첫 PISA 결과였다. 이 PISA 결과를 통해 독일 국내적으로는 또 하나의 중대 사실이 알려졌다. 놀랍게도 남쪽지역(바이에른, 바덴뷔르템베르그)의 학력수준은 북쪽 지방에 비해 심지어 2년이나 앞서 있다는 놀라운 사실이다. 즉 좌파에서 갈망하던 평준화, 평등화와는 정반대되는 결과가 나타난 것이다. 이런 상황 하에서 한국의 수능시험 같은 전국 종합적 학력고사는 시행되지 못하고 있다. 성적이 뒤지는 주 정부가 이런 저런 이유로 이에 참여하기를 거부하고 있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독일인은 특수한 경우 외에는 학교 성적에 큰 관심을 두지 않는다. 그런데 요즘 문제시 되는 것이 대학입학이다. 의과, 치과, 수의과, 약학, 심리학과는 지망생이 대학정원을 초과하는 과목이다. 그러다 보니 이 학과 지망자에게는 입학 전형에서 졸업성적이 가장 중요한 비중을 차지한다. 그런데 여기서 갈등이 생기는 것이 바로 위에 지적했듯이 나의 주거지에 따라 학력 차이가 뚜렷하다는 사실이다. 즉 남쪽의 최고점인 1점과 북쪽의 1점과는 학력에서 큰 차이가 크게 나타난다는 것이다. 대학입학 (Zulassung)을 전국적으로 관할하는 기관에서는 이 사실을 참작하여 남쪽 지방 고졸(Abitur) 성적에는 가산점을 주어 입학에 참작하였다. 그러나 이런 제도(?)가 누구에나 납득이 갈만큼 만족스럽고 신빙성있는 제도가 아닌 것은 당연하다. 여러모로 불만이 나타난다지만 별다른 해결방안은 없었다. 여기서 학교측이 고안해 낸 대안 역시 매우 비합리적인 방안이다. 학생들의 졸업성적을 후하게 주는 방향으로 기울기 시작한 것이다. 물론 이러한 경향은 수 년 전부터 학력수준이 높은 남부 지역에서 주로 나타나고 있다. 그 방법은 여러 가지다. 문제가 쉬워지는 경향이 뚜렷해 졌다. 어떤 교사는 필기시험 (Klausur)을 숙제로 대신하기도 한다. 시험을 앞두고 학생들을 상대로 종합 총정리를 해주는 경우도 나타났다. 요즘은 졸업성적을 공개하는 관례가 늘고 있다. 성적이 좋다면 일단 교장선생님도 만족할 것이며 학부모에게도 역시 가장 큰 관심사이다. 이런 문제로 한 교장선생님의 도를 넘은 경우도 있었다. 바이에른의 코부르그라는 중소도시 고등학교의 교장선생님은 독어담당이었다. 그는 전체 학생의 독어점수를 일률적으로 1점씩 상향 조정해주는 선심을 보였다. 물론 그는 책임을 지게 되었지만 점수조작이 일반화되어 있음을 보여주는 실례이다. 앞으로 이러한 교육계의 경향을 돌이킬 수는 없을 것이다. 장기적으로 남북의 하향평준화는 피할 수없는 결과로 나타날 것이 아닐까? [유럽리포트*2012]
6. 독일 노벨 수상자는 왜 문제인가?
노벨 의학상에 독일인이 수상자로 지명 되었다. 독일 언론에서는 30년 간 미국에서 연구를 계속해 온 쥐드호프를 독일인으로 오인(?)하여 크게 보도했지만 독일이 이 상황에서 자랑스러워 할 수 있는 것일까? 독일은 오히려 지금 수치감을 가져야 하지 않을까? 노벨상이 인간지능의 우위를 비교하는 상이라면 독일인의 우수성을 자랑할 만하다. 그러나 이보다는 왜 독일인이 독일에서 노벨상을 탈 수 있는 연구업적을 얻을 수 있는 여건을 갖지 못하는가에 관심이 쏠려야 한다. 쥐드호프는 독일에서 학위과정을 마치고 30년 전부터 미국에서 연구하고 있다. 그는 또 이미 미국국적 보유자가 되었다. 미국에는 연구목적으로 독일에서 온 학자가 많다. 이들은 독일에서 보다 더 좋은 여건을 찾아 미국을 택한 것이다. 최근 통계로는 경제학계에만도 300명의 최상급 학자들이 미국에서 활약하고 있다고 한다. 독일이 안고 있는 병인을 찾아본다면 첫째 꼽을 수 있는 것이 독일의 평준화된 제도다. 평준화는 평준화 된 업적을 내는 데는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게다가 만성적인 재정궁핍에서는 헤어날 수 없는 상태다. 학생 수가 증가하면서 교수들의 시간적 부담은 점차 커져간다. 연구보다 관료적인 행정업무에 매달리고 있는 실정이다. 지금까지 독일대학에서 노벨 수상자수는 손꼽을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지난 30년간 수상자 수는 영국에 비해 훨씬 뒤지고 있다. 그 원인은 제도에서 찾을 수밖에 없다. 지난 선거전에서 녹색당은 교육비 증가를 내세웠지만 이런 정책을 찾기 위한 포퓰리즘적인 정치인의 발언에 아무도 기대를 두지 않는다. 독일 정부는 쥐드호프를 독일인이라고 보고 있다. 그는 독일 여권연장을 포기하고 미국국적을 받았다지만 독일시민권 포기를 하지 않았다는 것이 정부의 해석이다. [유럽리포트*2012]
7. 독일 남북 경제력의 격차
어떤 국가에서나 지역에 따라 경제력의 차이, 빈부의 차이가 없을 수 없다. 그러나 독일에서 나타난 지역격차는 그 원인을 해명할 수 없다는 점에서 특징적이다. 그런 덕분에 학계에서까지 연구대상이 되고 있다. 매우 드문 일이다.
70년대 까지만 해도 독일경제의 중심은 북부에 집중되어 있었다. 우선 공업을 뒷받침하는 광산지역이 북쪽에 자리 잡고 있었고 함부르크를 위시한 북부 항만지역은 무역 중심지의 역할을 독점하고 있었다.
이에 비해 독일의 남부지역은 보수적이며 가톨릭이 강하고 가난한 농촌지역이라는 이미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남부 지역이라면 슈투트가르트가 수도인 하이델베르그, 칼스루헤 등이 있는 바덴 뷔르템베르그(Baden-Wuerttemberg) 주와 뮌헨에 수도를 둔 바이에른 주(Bavaria 주)를 꼽는다.
70년대 말에 들어오면서부터 남북의 여건이 바뀌기 시작했다. 광산지역의 경제적 비중이 상대적으로 약화되기 시작했다. 또한 생활여건이 질적으로 향상되면서 남부지역이 갖는 지리적인 장점이 돋보이기 시작했다. 남쪽으로는 알프스를 끼고 있는 이태리, 스위스 등 레저 관광지역이 인접해 있어 여름, 겨울을 막론하고 생활을 즐길 수 있는 유리한 지리적 조건이 주어졌다.
경제력의 차이
80년대부터 각종 통계자료에 드러난 남과 북의 경제력의 격차는 놀라울 정도였다. 대표적인 한두 가지 경제 데이터만 이 자리에 소개해본다.
인구 1인당 BIP를 보면 남쪽의 BW 주는 30.500유로, 바이에른 주는 32.100 유로인데 반해 북부의 Nordrhein-Westfalen 주(루르지방)는 27.100유로, 라인란드 팔츠 주는 24.200유로에 지나지 않는다.
기초생활수급자의 수는 1천명 당 남쪽의 BW 주 40, 9명, 바이에른 38,7명인 반면 북쪽 지역인 베를린은 143명, 루르지방은 76,6명, 함부르크는 104명에 달한다.
즉 남과 북이 빈부의 격차로 뚜렷하게 차별화됨을 볼 수 있다. 지방자치제에 의한 예산분배에서 프랑크푸르트가 있는 헷센 주와 앞의 두 개 주에서 독일의 나머지 전체 주에 재정지원이 이루어진다.
그 원인을 찾으려는 노력
이와 같이 경제력에서 남북간의 현격한 차이가 생겨난 이유를 어디서 찾을 수 있는 것일까? 이에 대한 궁금증은 이미 80년대부터 이어졌다. 학자들의 논란이 뒤따르면서 ‘시계가 남쪽에서는 다르게 가는가?’ 라는 질문이 나오기도 했다. 그만큼 해답이 미궁에 빠져 있다는 이야기다.
몇 년 전 남북의 격차를 학문적으로 다룬 저서가 출간 되었는데 여기에서는 바이에른 주의 사회구조 내지 사회문화적인 성격 등이 논의되며 지역적인 ‘특수한 의식’의 탓이라는 지적이 있었다. 농촌의 독특한 환경, 가톨릭 신자의 비율이 높다는 사실, 타 지역에 비해 뒤늦게 공업화가 시작되었다는 사실 등이 나열되었지만 학자들은 이러한 의미를 과대평가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지적한다. 또한 수십 년을 장기 집권하고 있는 보수계인 CSU (Christlich Soziale Union: 전 후 바이에른 장기 집권당)의 성공스토리는 구체성을 띤 정책을 펼친 덕분이라는 주장도 있었다.
이와 같이 학자들이 명확한 해답을 찾지 못하고 있기는 BW 주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학계에서 내놓는 해석은 상식수준을 넘지 못하고 있다. 이 BW 지역 사람들의 타고난 근면성과 창의력, 하이테크와 생활의 질의 겸비, 2차 대전 후 폴란드 지역에서 추방되어 온 독일난민들의 근면성 등이 나열되고 있으나 여전히 핵심적인 요인을 발견하지는 못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남북간의 한 가지 차이점은 정치성향에서 찾아 볼 수 있는데 우선 남부지역의 특징으로는 보수당이 장기집권 하고 있다는 사실을 들 수 있다. 2차 대전 이후 바이에른(Bavaria 주)주와 BW 주는 연속해서 보수당인 기민당과 기민당의 자매당인 기독교사회당이 연립으로 집권하고 있다.
위에 소개한 경제력의 차별화 외에도 남부지역에는 두 가지 돋보이는 점이 있는데 그것은 외국인정책과 교육정책이다. 그리고 이 두 사례는 이념적인 배경으로 한 해석이 가능하다는 점에서 우리의 관심을 끌만 하다.
외국인정책을 보면 문제의 초점은 현지적응 문제와 관련 된다. 좌파는 외국인에 대해 필요 이상의 관대함을 보였는데, 실질적으로는 관대함을 넘어 외국인은 무관심상태로 방치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특히 전쟁난민을 위주로 한 외국인의 입주에만 초점을 두었을 뿐 이에 수반되는 문제점에 대한 관심과 배려가 없었다. 그리고 다문화 (multikulturell) 사회의 형성을 외국인정책의 성공적인 표본으로 간주했다.
9.11 테러 이후 비로소 독일의 외국인 정책에 각성과 전환점이 되는 계기가 되었다. 특히 테러범들이 독일대학생 신분이었다는 사실은 매우 충격적으로 받아들여졌고 다문화사회의 실패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또 한 가지 남북의 차이점이 두드러진 분야는 교육 분야이다. 교육에서 남북의 차이가 가시화된 것은 PISA 결과를 통해서였다. 이 결과는 지방별 채점을 하면서 더욱 명확히 드러났다. 가장 광범위한 연구는 베를린 훔볼트 대학의Lehmann교수 주도하에 이뤄졌다. 그것은 1995년부터 북부도시 함부르크와 BW 주의 초등학교 5년생을 무려 9년간에 걸쳐 비교 연구한 자료였다. 이미 남북의 일반적인 격차에 대해서는 잘 알려져 있었기 때문에 당시 함부르크 교육위원회가 이 비교 테스트에 동의한 것 자체가 놀라운 일이었다고 레만교수는 회고했다.
결과는 놀라웠다. 우선 고등학교에서 수학 선택반 학생의 성적을 수치로 비교해 보았다. 여기에서 함부르크보다 BW는 78점이 더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40점은 1년 간 학습한 분량에 해당한다. 즉 BW 주 학생들은 함부르크시의 학생에 비해 무려 2년의 수업을 더 받은 만큼의 실력 격차를 드러낸 것이다. 남부지역 학생들이 월등하게 성적이 우수하다는 사실은 PISA 결과 밖에도 여러 조사에서 확인 된 바 있다. 이와 같이 실력차이가 드러날 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북부 지역 주는 종합수능시험을 노골적으로 거부할 정도이다.
대학의 경우 역시 마찬가지이다. 2006년과 2007년에 정부는 대학에 연구비지원을 위해 - 소위 엘리트대학 육성이라는 명목으로 – 연구프로젝트 선발을 했다. 여기서 2006년에 선정된 대학은 남부 독일 두 개 주에 있는 3개 대학뿐이었다. 결국 2007년에는 국가에서 계획적으로 타 지역의 대학도 일부 선정대상으로 정할 수 밖에 없었다.
우리의 눈에 띄는 것은 외국인정책과 교육정책을 통해 이념 지향적인 좌파정책의 실체가 드러난다는 것이다. ‘이념 지향적’의 특징을 꼽는다면 이들은 큰 것. 거시적인 것, 즉 ‘이데올로기’에 도취되어 있어 세부적인 미시의 세계를 경시한다는 공통점이 있다는 것이다.
즉 독일에 외국인이 다수 유입되어 거주하고 있다는 사실에만 도취되어 있었고, 30년 전 도입된 교육개혁이라는 새로운 제도를 창출했다는 자부심에 도취되어 세부적인 상황변화에 적응하지 못했다. 변화란 미시적인 의식의 변화가 첫 걸음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남북지역 간 경제력의 차별화역시 이념적인 특성과 연계시킬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유럽리포트*2010]
8. 전문대와 일반대의 차이
전문대 설립 후 초기에는 졸업 학위명칭에 이어 괄호 안에 FH (Fachhochschule)라고 명시하게 되어 있었다. 그러나 최근 대학과 전문대 졸업학위 명칭이 벳첼러와 디플롬으로 차이가 완전히 제거되면서 적어도 외관상으로는 전문대와 일반대간에는 전혀 차이가 없게 되었다. 단 한 가지 과정상 차이가 있는데 전문대에서는 박사과정을 택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이 차이가 처음으로 Schleswig-Holstein 주에서 사라진다. 주문부성 장관이 이 변경사항을 추진하기로 했다. 따라서 다른 주에서도 점차적으로 차등화가 없어질 것으로 예상된다. 그간 여러 전문대에서 이 제도상의 차등화에 대한 불만이 높아가고 있었는데, 이 주에는 Kiel 대학과 Luebeck 대학이 일반 대학이며 그밖에 여러 전문대학이 있다. [유럽리포트*2012]
9. 기업의 부패규정
사업상 관계로 간단한 선물을 하게 되는 수가 있다. 그런데 지멘스 사건 이후 법 적용이 까다로워졌다. 기업에서는 Compliance 구조라고 한다. 법적 규정에 윤리적인 관점도 포함시켰다. 그렇지만 어느 정도의 선물이 허용기준에 속하는가는 여전히 논란거리이다. 연방공무원들은 25유로 이상의 가치가 있는 물품에 대해서는 상사의 허락 없이 받을 수 없다. 베를린 검찰은 더 엄격해서 5유로가 넘으면 수사대상이 된다. 사기업에서는 35유로를 한계선으로 하기도 한다. 안전하게 하려면 상급자에게 보고해야 한다. 식사대접은 까다로운 사안이다. 기업에 따라 35 내지 50유로 선이다. 외국 체류중에는 더욱 까다로워진다. 좋은 선물을 사양했다가 예의에 어긋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유럽리포트*2013]
10. 독일 남북격차에 대한 새로운 해석
독일의 남북간 경제력격차에 관해 이번에는 동독 예나(Jena)대학 사회학 교수가 새로운 해석을 발표하여 주목을 끌고 있다. 경제력뿐 아니라 학문수준과 교육수준에서까지도 생긴 남북간의 격차라는 사회현상에 대한 학자의 관심이다. 그의 요점은 남쪽 사람들은 자기 생의 문제를 스스로 개척해 나가는 정신이 투철한 때문이라는 주장을 내고 있어 앞으로 흥미있는 논쟁거리가 될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즉 멘탈리티의 차이로 인해 남북이 차별화되었다는 것이 힐데브란트 교수의 지론이다. 직장에서 보나, PISA 결과를 보나 대학수준을 보나 각 분야에서 예외 없이 남부 독일인은 자립정신이 약한 북부 독일인에 비해 우수성을 발휘하고 있다고 그는 지적한다.
원인을 그는 역사적인 배경에서 찾는다. 2차 대전까지 북부 독일인들은 프로이센 지주들의 소작인으로 일해 왔다. 이는 독창성이란 요구되지 않는 작업으로 이들은 마치 ‘내버려졌다는 감정 (Gefuehl von Ausgeliefertsein)’을 소유하게 된 것이라고 그는 표현했다.
이에 비해 남부지역의 농민들의 배경은 달랐다. 남부에는 중소 농장이 많아 자립적으로 일하는 습성에 익숙했다. 게다가 소규모농장은 수확이 넉넉하지 못해 농부들은 다른 수입원을 찾아야했다. 즉 공장에서 일하거나 창업을 하기도 했다.
힐데브란트 교수는 자기 지론에 대해 확신을 갖고 있다.
‘이 역사적인 발전과정이 오늘까지 시민의 생활방식이나 사고양태에 영향을 남긴 것이다. 그간 사회구조는 변했으나 인간의 멘탈리티에는 변화를 미치지 못했다.’ 한 가지 예로 북부 독일에는 아이들 방에 TV 대수가 훨씬 많은데 이는 북부에서 부모들이 아이들과 보내는 시간이 적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해석한다.
이 주장에 대해 베를린대학 놀테 교수는 전혀 근거 없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특히 경제발전에는 문화적인 요소가 상당한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힐데브란트 교수의 주장에 대한 반론도 있다. 역시 베를린대학 겔퍼트 교수는 신빙성이 없어 보인다고 평하며, 역사적 사건이 멘탈리티에 영향을 주는 것은 사실이지만 북부 독일인이 자립성을 잃은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북쪽에는 신교 기독교인이 다수인데, 이들은 종교관의 영향 하에 생산적이며 개인주의적인 특성이 있다는 사실을 지적했다. [유럽리포트*2013]
11. ‘빅뱅에서 빅 쇼로’
인간이 품고 있는 우주에 대한 물음은 인류가 존재해 온 이래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다.
20세기 초인 20년대까지 우주는 변화하지 않는 정적인 존재라고 믿었다. 그러나 처음으로 과학적인 실험결과를 통해 우주가 팽창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팽창의 속도는 은하가 멀수록 더 증가하고 있었다. 영국의 천체물리학의 세계적 권위인 호킹은 우주 팽창의 속도를 동전의 크기에서 1의 마이너스 30승 초에 은하 넓이의 천만 배로 팽창한다고 했다. 어쨌든 Hubble이 스펙트럼 분석으로 얻은 이 우주팽창설은 우주과학 이해의 전기를 이룬 셈이다.
여기서 이 우주의 팽창과정을 반대 방향으로 돌이킨다고 가정해 볼 수 있겠다. 그러면 우주는 계속 축소되어 원점에 접근하게 될 것이다. 즉 우주의 근원인 이 미소 점은 상상하기 힘든 정도로 작으면서 무한에 가까운 큰 비중과 열 에너지를 보유하고 있을 것이다. 즉 이 특이점(singularitaet)은 우주의 모든 에너지가 집중되어 있는 점이다. 원점과의 거리는 10의 마이너스 35승 미터(Planck 기리)라는 상상조차 하기 힘든 단위로 축소된다. 그러나 '0'에 이를 수는 없다. ‘0’ 에서는 공간이 곡선을 그리며 압력과 온도는 무한으로 증가한다.
우주의 폭발과 팽창은 생성과정과 원인을 알 수 없는 이 ‘에너지 뭉치’ 의 폭발로부터 시작되었다고 보는 것이 빅뱅 이론이다. 이때가 우주의 존재가 시작되는 순간이다. 시간과 공간도 동시에 생성되기 시작했다. 그것은 137억 년 전이었다는 결과도 나왔다. 이 빅뱅 이론에 대해서는 네 가지의 강력한 과학적 증거가 있어 전반적으로 인정되고 있지만 반론도 일고 있다. 2004년 『New Scientist』지에는 빅뱅이론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론에 많은 학자들이 서명한 일이 있었다.
관심의 초점은 이 대폭발의 초기 단계에 집중되어 있다. 빅뱅의 원인 즉 우주생성의 근원에 대한 의문과, 이와 직결되어 빅뱅 이후 첫 1초 혹은 10초 이내의 의문을 밝히려는 것이다.
우주생성에는 신의 의지가 개입되었다는 이론이 있는가 하면 ‘무(Nichts)’에서 생성되었다는 이론도 있다. 이 후자는 양자 효과(물질의 미시의 세계를 다루는 Quanteneffekt)로 우주생성을 설명하는 것으로 이는 공간과 시간이 없는 상태에서 에너지를 생성시켰다는 초자연적인 힘으로서의 신의 의지를 배제한다. 이는 양자역학의 터널효과 - 일부 입자가 에너지가 부족해도 높은 에너지장벽을 넘는다는 - 와 양자요동 등을 통한 우주 생성론이다.
또 여러 우주의 공존설이 있는가 하면 두 개의 우주론도 있다. 호킹은 마치 끓는 물에서 거품이 생겨나 일부 사라지기도 하고 혹은 점차 커질 수 있는 현상과 우주탄생을 비유한다.
위에 소개한 물리학자들의 서명운동은 천체물리 전반에 대한 회의론을 제기한 것이어서 큰 의미가 있다.
독일에서 최근 한 이론물리학자의 저서가 파문을 일으키고 있다. 현재 뮌헨에서 고교교사로 있는 필자 운찌커(Unzicker) 박사는 다년간 천체물리학자로 활약했었다. 그의 저서는 천체물리학 전반에 대한 비관적 회의주의에 싸여 있다. 그의 반론은 다각적이다. 300여 단원으로 간략하게 천체물리 전반에 대한 비판적 논평을 가하고 있다.
그는 ‘집안망신을 시키는 자(Nestbeschmutzer)’의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Vom Urknall zum Durchknall』이라는 책의 표제 역시 도전적이다. 빅뱅은 독어로 ‘Urknall’로 번역된다. 원초적 폭발이라는 뜻이다. 이 제목은 ‘빅뱅에서 빅 쇼로’라는 번역이 적합할 수 있겠다. 이론물리에 대한 근본적인 불신감이 깔려 있는 저서이다.
태양계에서 테스트한 이론을 전 우주에 확대 응용한다는데 무리가 있다는 주장을 펴며 양자이론(Quantentheorie)에 대해서도 같은 의문을 제기한다. 미시세계에 적용되는 이론을 우주현상에 적용한다는 데 대한 회의적 시각이다. 앞으로 우주 생성이론을 종합적으로 해결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는 ‘M- 이론’ 에서도 혼란스럽기는 마찬가지다.
호킹에 따르면 우리의 우주는 ‘무’에서 생성된 많은 우주가운데 하나일 뿐이며 이러한 결과는 물리법칙, 즉 자연과학에 기초한 예측에서 나온 당연한 결론으로 본다. 그리고 이러한 창조에는 초자연적인 존재의 개입을 요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저자는‘천체물리학에는 점성술에 맞먹는 웃기는(laecherlich) 헛소리가 많다’는 혹평을 가하기도 한다. 이론물리학의 결과를 과학 공상소설과 비교도 하고 있다. 예로 빅뱅이론의 핵심을 이루는 폭발에 의한 배경복사(Hintergrundstrahlung)의 마이크로웨이브 파는 빅뱅 초기의 불덩어리에서 나온 수소와 헬리움이 – 당시에는 원자의 구조조차도 없는 상태였다 – 100억년( ! ) 이상이 지난 지금 측정기에 도달했다는 사실에 소름을 끼친다고 서술하고 있다.
그의 저서는 국제학술회의나 개인적인 접촉을 통해 학자들과 대담을 한 내용 혹은 학술논문에 대한 자신의 해석과 회의적인 견해를 피력해 놓은 단편집이다.
여기서는 수학적 결과가 자신의 현재 모델과 일치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배제된다. 이론적인 계산에 사용되는 많은 모델은 점차 복잡해지고 있으며 의미를 알 수도 없는 수식으로 바뀌어 간다. 입증이 안 된 가설이 나타나고 임의로 선택될 수 있는 파라미터는 자기 주장에 부합되는 것으로 선택되어 이론구성에 뒷받침이 된다. 저자는 ‘초끈이론(Stringtheorie)’ 을 종교와 비교하기도 한다. 이론에 바탕을 둔 계산의 결과가 아닌 믿음의 소산이라는 것이다.
심각하게 받아들여질 만한 저자의 반론도 있다. 그것은 열역학이나 핵물리학 법칙이 빅뱅이 일어난 당시에도 유효했다고 가정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얻어진 결과는 정확성이 결여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저자는 오늘날 이론물리에 대한 근본적인 불신감이 일고 있다고 말한다. 이제 이론물리가 막다른 골목에 달했고 학문의 영역을 벗어나는 환상에 가깝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학자들의 헛소리 같은 결과를 신뢰하지 말고 읽으면서 스스로 사고하라는 것이 그의 충언이다.
물리학이 불만족스러운 결과를 낳고 있는 현실에서 우주의 궁극적 비밀을 탐구하려는 인간지능의 한계를 엿볼 수 있다는 점은 오히려 충분한 의미와 시사점을 품고 있다고 생각된다. [유럽리포트*2013]
12. Wagner 축제의 이변
독일에서 가장 화려하고 전통 있는 음악제는 바이로이트 바그너 축제(Bayreuther-Wagner-Festspiele.de) 이다. 매년 여름 휴가철이 시작되는 계절에 바그너가 100여 년 전 직접 건립한 바이로이트의 Festspielhaus에서 열리는 금년 103회째의 축제이다. 축제와 관련하여 관심을 끄는 사항이 있다. 우선 바그너 집안 후손들 간에는 연출, 감독, 운영 등을 에워싼 사안에 대해 끊임없는 알력이 이어지고 있다는 사실이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마치 기사거리 부족으로 고민하는 대중지를 위해 쇼를 꾸며나가는 듯한 인상을 주기도 한다. 또 다른 문제점은 입장권을 둘러싼 논란이다. 비싼 가격이 형성된 것은 그만큼 수요가 큰 때문이다. 일반인은 10년은 기다려야 입장권을 구할 수 있다는 주장이 과장이 아니었다. 실은 입장권의 가격(40 ~ 300 유로)이 문제시 된 것이 아니라 표가 어떤 루트를 통해 분배되는 것인지 투명성있게 공개된 사안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결국은 연방감사원 감사를 거치고 내막이 공개되기 시작한 것은 불과 2년 전이었다. 입장권은 바이에른 주 노조에도 일정 매수가 증여되었는데 100여 년 전 음악당 건축시 노조의 노고를 치하하기 위함이다. 또한 입장권의 40%는 인터넷을 통해 판매되고 일부는 여행사에도 배당되었으나 이 역시 금지되었다. 노조에 배분된 입장권의 상당량이 암시장으로 나돌아 원가의 700%까지도 호가되었기 때문이다. 1876년 첫 축제에는 황제 빌헬름 1세와 외국 왕을 위시해서 프란츠 리스트, 차이콥스키, 브룩크너, 톨스토이, 니체 등 당대의 유명인사들이 다수 참석했다. 이 전통이 이어지면서 지금까지도 수상이나 정계 인사, 연예계 등에서 언론을 타는 인물들의 의상이 대중지의 주요 보도자료가 되어 왔다. 그러나 관객 중에는 한량들도 다수 섞여 있어 1막이 끝나면 자리를 떠나는 ‘이벤트 관객’이 상당수가 된다고 알려져 있다. 이러한 추잡한 환경이 언젠가는 폭발할 듯한 분위기를 조성해온 것이 사실이다. 현대 독일 사회정서에 어울릴 수 없는 양태가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 변화의 첫 장면이 작년에 이어 금년에 더욱 뚜렷해졌다. 우선 메르켈 수상이 나타나지 않았다. 그리고 10년 대기해야 구한다는 첫날 입장권이 남아돌고, 인터넷에는 고가 입장권을 팔겠다는 암시장이 크게 형성되고 있다. ebay에는 심지어 원가 이하 가격으로 입장권이 나돌고 있다. 바이오 가스 생산지가 연출 장면으로 나타나고 마피아와 칼라슈니코브 기관단총이 난무하는 탄호이저를 감상하며 100여 년 전 음악의 정신세계와 오늘날의 세계를 연계하는 혼돈을 겪어야 하는 장면이 벌어진다고 한다. 금년에는 정말로 보도할 내용이 없다고 쓴 언론기사가 실소를 머금케 한다. [유럽리포트*2013]
13. G8, G9의 선택
13년제인 독일고등학교 Gymnasium(G9)을 고등학교 8년제인 G8로 1년 단축하는 개혁안은 독일에서 가장 혁신적인 교육개혁안에 속한다. 이는 대학과정을 뱃첼러와 마스터 제도로 변경하면서 때를 같이해 이루어지고 있는 개혁이다. 지금 와서 이 제도개혁을 급진적으로 실천에 옮기게 된 계기는 20년 전부터 번져간 세계화로 인해 위기감을 느끼게 된 때문이다. 고등학교 제도는 이미 바이마르 공화국 시대부터 초등학교 4년과 고등학교 9년으로 규정되었었다. 그 후 1936년 히틀러는 고등학교를 12년으로 1년 단축했는데 이는 고졸생을 장교후보생으로 빠른 시일 내에 군에 입대시키기 위한 군사적 목적에서였다. 전 후에 서독은 다시 13년제로 돌아가고 동독은 12년제를 유지해 왔었다. 즉 지금의 개혁으로 김나지움이 100년 만에 8년제가 된 것이다. 정부의 조건은 학과과정과 내용에서는 개혁 전과 차이가 없어야 한다고 못박았다. 결과적으로 수업을 더 강화한다는 뜻이다. 이와 같이 G8 반이 전반적으로(1개주만 제외) 도입되었으나 예상외로 개혁안에 대한 반발이 심해져 갔다. 반대이유는 첫째 학생들의 학과부담이 과중하다는 것이었다. 오후에 운동이나 기타 자기 취미생활을 하기 위한 여가가 부족하고 학과부담의 증가로 이해중심이 아닌 주입식 교육방법으로 바뀌고 있다는 –이런 불만은 대학에서도 마찬가지다- 점이 지적되었다. 이 압력으로 호황을 누리는 업종이 동네마다 세워진 소규모 학원들이다. 교육계뿐 아니라 학부모, 정계까지도 찬반 양파로 갈라졌다. 학부모들은 데모도 하는 등 반대운동이 거셌다. 헷센 주의 경우를 보면 학부모의 무려 80%가 9년제를 찬성하고 나섰다. 결국 주 내 107개 고등학교 가운데 39개 학교는 다시 9년제로 되돌아가고 말았다. G8 과정과 G9 과정을 병행해서 도입한다는 기발한 아이디어를 제안한 학교도 나타났다. 학생들이 각자 희망과 능력에 따라 8년에 마치거나 아니면 9년에 마치는 자율 선택안을 제시한 것이다. 매우 합리적이며 실용적인 제도인 듯 하지만 실제로는 장애요소가 클 수 밖에 없다. 프랑크푸르트 근교에서 G8와 G9을 병행할 계획이던 한 고등학교는 6개의 추가 교실수요를 해결할 방법이 없어 이를 취소해야 했다. 기업측에서는 8년제를 적극 지지하고 나섰다. 이 배경에는 교육이란 평생교육의 시대라는 의식이 깔려있다. 첫 단계 교육과정을 줄이고 취업 후 석사과정을 이수하는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독일 인구감소 역시 8년제를 지지하는 이유로 꼽힌다. 장기적인 안목에서 볼 때는 8년제가 관철될 것으로 교육학자들은 보고 있다. 그러나 지금의 상황에서 혼란을 끼칠 소지가 되는 것은 타 지역으로 전학을 하는 경우 부딪치는 문제들이다. 앞으로 몇 년이 지나면서 종합적인 평가가 있겠지만 8년제가 수반하는 장점이 학생들 자신을 위해서나 국가적으로 큰 이익이 될 것은 확실하다. 우선 학생들은 더 극심한 경쟁의식과 스트레스 속에서 헤쳐 나가는 훈련을 거치는 셈이다. [2014년]
14. 과잉 생산되는 문학작품
곧 세계 최대 규모의 프랑크푸르트 서적 전시회가 문을 연다. 모래알같이 많은 신간 전시장 틈을 거닐고 나올 때면 모든 방문자들에게서 지친 모습을 역력히 찾아볼 수 있다.
출판사의 과잉생산이 그 원인이 아닐까? 도대체 신간서적의 양은 어느 정도 되는 것일까? 지난해에는 12만권이 전시되었다. 독일어권에서 출판된 문학 계열 서적은 1만4천권이었으며 이중 약 절반, 즉 7천권이 신간 소설이었다. 이 막대한 양의 7천권 가운데 단 10%를 읽어 볼 가치가 있는 소설이라 가정하더라도 1년간을 쉬지 않고 하루에 두 권씩을 소화해야 어느 정도 소설분야를 이해했다고 말할 수 있는 정도다.
신간은 수개월이 지나면 판매 리스트에서 사라지고 만다. 영원히 기억에서 지워져 버리는 것이다. 신간의 수가 많을수록 회전속도 역시 빨라진다. 마치 새로운 기계가 시장을 점령하듯이. 그럴수록 문학작품의 세계에서는 고전의 의미가 더욱 중시되기 마련이다. [유럽리포트*2014]
15. 독일식 짠돌이의 성공담
독일에서 제일가는 갑부 10명을 꼽으면 3위까지의 순위에는 독일을 주름잡고 있는 디스카운트 식품 마트(Aldi와 Lidl)가 포함돼 있어 이색적이다. Aldi라는 체인은 두 형제가 운영하면서 독일을 남북 지역으로 분리해서 운영하고 있다. 이들이 독일에서 1, 2위 갑부이며 3위 역시 Lidl이라는 저가 식품 체인 운영자다. Aldi 운영 형제는 2차 대전 시 미군과 소련군 포로에서 석방된 후 집안의 소규모 식품점을 인수받아 공동 운영했다. 초기에는 운영자금 부족으로 식품종류를 늘리지 못했다. 그런데도 장사가 잘 되자 그들의 첫 운영 아이디어가 싹텄다. 품종확대가 우선이 아니라 제한된 상품 종류이지만 질 좋고 값싼 식료품을 공급한다는 것이었다. 지극히 평범한 이 경영방식을 60년간 이끌어 가면서 독일 제일가는 갑부까지 올라선 이들 형제에게는 또 하나의 특징이 있었다. 신앙심 깊은 가톨릭 신자인 이들은 너무 검소한 수전노 생활을 했다. 지난 달 사망 시까지 그가 찍은 사진이라곤 1970년대와 80년대 각기 한 장 뿐이었다. 대외적인 접촉도 알려진 사례가 없다. 그는 거주도시 엣센 시 공동묘지에 가족용 묘지를 위한 작은 땅을 샀었다. 그런데 몇 년이 지나도록 손질을 하지 않자 시 당국이 경고장을 보냈다. 그의 변명은 자기 상점 Aldi에서 꽃과 식물이 세일 값으로 나올 때를 기다리고 있다는 답변이었다. 1970년대에는 강도에 인질로 잡혀 당시 돈으로 몸값 700만 마르크라는 거액을 지불하고 풀려난 적이 있었다. 그런데 인질범들은 당시 50대였던 이 거부를 인질로 잡았지만 그의 남루한 옷으로 보아 도저히 주인으로 인정할 수 없었다. 범인들은 그 자리에서 그의 신분증을 요구하고 비교한 후에야 납치해 갔다. 이쯤 되면 독일을 대표하는 갑부와 짠돌이의 이야기가 되겠지만 그가 후세에 보여준 교훈적 가치는 더 귀중한 것이다.
최근에는 독일의 이 두 업체가 프랑스와 영국에 진출하기 시작해 현지 기업들이 상당한 긴장하고 있다는 보도가 있다.
소비자를 위한 희소식으로 이어질 수 있을 것이다. 반대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유럽리포트*2015]
16. 국력을 과시하는 GDP
BIP (Bruttoinlandsprodukt 혹은 GDP)는 ‘국민총생산고’ 즉 한 국가의 모든 상품가치와 서비스 업무를 돈으로 환산한 국력의 지표이다. 모든 통계가 그렇듯이 국력의 계산에서도 나라마다 유리한 통계방법을 택하는 것이 일반적이라고 알려져 있다. EU도 이 점에 착안하여 글로벌한 기준에 맞춰 나가기로 했다. 이에 따라 9월부터는 마약판매나 담배밀수도 나라의 경제력에 포함된다. 담배판매와 담배밀수 사이에는 둘 다 소비자의 욕구를 충족시켜주는 행위이므로 같은 서비스업에 포함된다고 본다. 그러나 마약과 담배 밀수에서는 국내에서의 판매 수익만 경제력에 참작되며 수입가격은 포함되지 않는다는 규정이 있다. 섹스 산업 역시 EU에서 9월부터 총생산고에 포함된다. 그렇지만 독일에서는 성 매매가 이미 허용되어 있으므로 이미 국가 총생산고에 포함되어 있다. 섹스 산업계의 수익은 120만 명의 남성에 의해 연간 140억 유로에 달한다. 그렇지만 실제 국민 총생산고는 50% 정도에 지나지 않는데 각종 부담금이 연말정산에 포함되기 때문이다. 안전 및 포주비용, 방세, 의상, 콘돔비용 등이다. 이를 제하고 나면 한 번의 매춘행위가 국민 총생산고에 기여하는 가치는 30유로가 약간 넘게 계산된다. 그런데도 국민 총생산고가 1년에 3%가 증가한다는 것은 매우 높은 수치다. 이는 앞으로 기업의 연구개발비 (F + E : Forschung und Entwicklung)를 투자비용에 포함시키기 때문이다. 그뿐이 아니다. 앞으로는 군함, 탱크 혹은 로켓 등의 구입도 투자에 속한다. [유럽리포트*2014]
17. 동독 지역에 나치성향이 강한 이유
2015년 1월 독일에서는 1년에 3 만 명의 난민이 올것으로 예견했었다. 이 예측은 그간 몇 번 바뀌면서 10만, 30만, 80만 명을 넘어 이제는 연말까지 100 만 명의 난민이 몰릴것으로 예견한다. 예견이 빚나가듯 정부나 EU의 대책은 너무나 혼란스럽다.
8월 들어 독일에서는 난민수용 예정이던 숙소에 방화사건이 연이어 발생했다. 이를 규탄하는 모임을 갖는 시민단체도 있었지만 다른 한 편에서는 나치들의 반 외국인 데모가 계속되어 왔다. 단순한 데모가 아니라 난민수용시설에 대한 방화사건이 계속 이어진 것이다. 나치 데모대들은 경찰과도 대치하여 폭력시위를 벌렸다.
금년 들어 나치들의 폭력행위는 양적으로 그리고 질적으로 점차 도가 심해졌다. 금년들어만도 정치성을 띈 폭력행위는 전국적으로 300 건에 달한다. 경찰이 수세에 밀릴정도로 과격한 폭력도 잦아졌다.
이렇게 몇일이 지나면서 돌연히 동독 주정부장관들의 발표가 주목을 끌었다. 그 내용인즉 지금 독일에 일고 있는 반외국인 폭력이 동독지역에만 벌어지는 현상이 아니라는 것이다. 독일에서 가장 부유하다는 바이에른 주와 바덴뷔르템베르그 주에도 마찬가지가 아니냐는 지적이었다.
주 장관들이 이런 사회분석을 발표한 것은 전례없는 일이다. 이런 행동은 일종의 자격지심의 발현으로 보인다. 정량적인 분석없이 본다면 이들의 주장이 거짓이 아니다. 그간 드물게 나타나던 테러사건이 서독에서 가장 부유한 이 두 지방에서 증가한 것이다.
그러나 다른 각도에서 본다면 동독의 인구는 16% 인데 나치범죄율에서는 65%에 달한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여기서 당연히 동독지역에 나치 범행률이 매우 높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이 발표와 동시에 해석도 따랐다. 동독인들은 지난 80 여년 간을 철저한 독재정권하에서 살아왔다. 이로 인해 동독인은 지금도 변화에 대한 공포감에 시달리고 있다는 것이 주된 요인으로 지적되었다.
때를 같이 해서 베를린대학에서는 구 동독시대의 외국인 문제에 대한 연구보고가 있어 흥미를 끌었다.
이에 의하면 1980년대 1500 명의 월남인이 동독기업에 노무자로 왔는데 이들의 업무능률이 좋아 동독노동자들과 알력이 생길 지경이었다는 것이다. 동독기업은 태만하고 일의 능률에는 관심이 없는 분위기였다.
외국인들은 제대로 대접을 받지 못했다. 4×5 미터 방에 침대 4개 , 옷장, 세면대가 하나 있는 숙소였다. 그런데도 외국인에 대한 동독인들의 반감은 커졌고 시민들의 요구로 월남인의 숙소를 줄여야 할 정도였다. 게다가 동독정권이 멸망하기 2,3 년 전부터 월남인들은 컴퓨터 사업을 시작하고 월남에 수출도 했다.
개인적인 상행위를 혐오하던 동독정권에는 이들의 물욕, 영업행위에 대해 부정적으로 보는 시각이 컸으며 기생충같은 (parasitaere) 생활양식에 대해 (당시 동독에서 사용한 어휘) 동독인의 눈에는 가시로 보았다는 것이다. 국가선전에는 외국인이 ‚동무‘였지만 이유없이 혐오의 대상이 되었다.
동독비밀경찰 서류에는 동독에서 있었던 반 외국인, 반 유대인 사건이 기록되어 있었는데 놀랍게도 동독에 친 나치성향이 계속 유지되어 온데는 그 이유가 있었다.
그 뿌리를 보면 1947년 당시 소련 점령군은 군사 명령으로 나치범죄자에 대한 법적 청산작업을 중단하고 나치 장교 등 히틀러 밑에서 근무하던 요원들을 직접 동독 정권정당인 SED 당원으로 받아드린 것이다. 독재자 히틀러에 추종하던 중견간부들이 하루 아침에 공산당 간부로 탈바꿈을 했다. 지역에 따라 35%의 공산당원이 과거의 나치당원이었다고 한다.
이때부터 동독정권자에게 ‘나치란 서독에만 존재’ 한다는 통념은 일상적인 선전문구에 속했다. 그리고 동독에 그 많은 나치추종자들이 동독정권의 요원으로 봉사하고 있다는 사실은 끝까지 국가 일급 비밀사항으로 취급되어왔다.
즉 서독에서 오늘까지도 이어지고 있는 탈나치 운동은 동독에서는 아무도 접해본 적이 없다는 사실을 근본요인의 배경으로 보는 것이다. 동독지역에 친 나치층이 강하다는 것은 표면화 된 사실이지만 이 델리케이트한 문제를 서독측에서는 아무도 거론한 적이 없었다. 다행이 이번에 동독 정계 스스로가 이 문제를 쟁점화 한것이다. 앞으로 더 논란을 겪어야 할 사안이다.
역시 비밀경찰문서에 의하면 공산당중앙위원회 건물에는 1960년대 5년간에만도 30회에 걸쳐
친 나치 낙서사건이 있었으며 청소년들 사이에서는 학교, 공장 등에서 이런 사건이 자주 벌어졌다. 동독인이 서독인에 비해 훨씬 더 민족주의적 색채가 강하다는 내부문서도 있었다.
동독정권이 무너진 직후 사회주의 모범도시로 지정된 한 중소도시에서는 통일을 기뻐하기도 전에 반 외국인 테러가 발생했다. 폭력을 휘두르는 무리들에게 주위 시민들이 박수갈채를 보내는 살인사건이 벌어졌다. 전 세계를 경악감에 빠트렸다.
이때 동독수상이었던 호넥커는 ‘외국인에 대한 증오감은 독일인 멘탈리티에 박혀있다. 그러나 동독에서 이 문제는 극복되었다. 5월 노동절에는 세계 각국인과 피부색갈이 다른 국민들이 우애속에서 함께 행진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라는 말을 던진적이 있다. 현실감각을 상실하고 환상과 착각으로 쌓인 모습이다. 독재국가의 권력층에 흔히 나타나는 징후이다. [유럽리포트*2007]
이상적인 사회를 지향하는 과정에서 교육의 중요성이 절대적임은 새삼 강조할 필요가 없다. 교육이념에 따라 교육의 세부목표와 내용, 교육방식 등도 자연히 영향을 받게 된다. 지금껏 독일교육계에서 관심의 초점이 된 사안은 ‘엘리트’ 개념이었다. 투쟁의 논리가 지배하던 100여 년 전부터 시작하여 통일 후인 10여 년 전까지 엘리트 개념은 독일사회에서 부정적인 의미로 인식되어 전적으로 거부되어 왔다. 그 직접적인 원인으로는 히틀러의 국가사회주의 (Nationalsozialismus) 하에서 벌어진 범죄행위에 독일의 엘리트층이 다수 동조 협력했던 사실을 꼽을 수 있다. 권력 엘리트 형성 계층이 국가의 불행을 가져 온 주체가 된 것이다.
미국은 물론 영국, 프랑스에서도 엘리트교육이 제도화되고 있는 점과 비교해 보면 독일의 경우는 극히 예외적인데, 엘리트 의식은 히틀러 시대의 유물인 ‘반 민주적 사고’ 에 대한 거부와 같은 맥락이어서 설 자리를 잃었다. 당시 독일사회의 핵심 이슈는 민주주의와 평등의식이었으며 엘리트는 이와 대립되는 의미로 받아들여진 것이다. 일상적인 용어 사용조차 완전히 터부시 될 정도였다. 그러나 이데올로기 논쟁의 종말과 함께 서서히 변화가 시작되었다. ‘엘리트’ 는 사회적으로도 부담 없는 어휘로 자리 잡았고 민주주의와 엘리트는 더 이상 배타적인 개념으로 해석되지도 않았다. 글로벌 경쟁시대의 도래도 이러한 변화에 박차를 가하였다. 독일 교육계는 최근 들어‘엘리트’개념을 서슴치 않고 사용하게 되었고, 정부 역시 엘리트 대학을 육성하겠다는 의지를 명백히 하고 있다. 단지 엘리트라는 개념의 진정한 의미를 무시한 채 오히려 개념사용을 남발하고 있다는 느낌이다. 외국의 엘리트 대학과 같은 수준의 대학을 잉태하기에는 아직 기본조건이 형성되어 있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정부가 엘리트 대학 육성을 추진하려는 의지를 표명했다는 사실만으로도 독일로서는 패러다임의 변화를 이룬 장족의 발전으로 볼 수 있다. ‘엘리트’ 개념 못지않게 독일교육계에 부정적 역할을 끼친 이념이 ‘평등주의’ 이다. 이는 좌파이념의 핵심이기도 하지만 이미 독일교육계에 오래도록 뿌리내려 있는 전통에 속한다. 교육에서는 ‘평준화’ 로 나타나는 평등의식은 학력수준을 저하시키는 요소이기도 하다. 독일사회에서 ‘경쟁의식’ 에는 부정적인 고정관념이 박혀 있으며, 경쟁을 통한 서열화보다 평등이 우위에 서야 한다는 고정관념이 유지되어왔다. 현재 독일교육계에서는 평준화로 인한 여러 현상들이 나타나고 있다. 대표적 사례로서, 대학교수직은 공무원 직으로 분류되어 업적에 따른 급료수준의 차등화가 없다. 전국적으로 모든 대학이 동일한 수준에 머물러 있다는 점도 하향평준화의 결과이다. 또한 전국 단위의 수능시험이 도입되지 못하고 있는 것은 경쟁의식의 결여로 인한 교육계의 나태성의 표현이기도 하다. 대학입학 제도 역시 모순이 크다. 한 예로 고졸점수 미달로 인해 의대 입학이 안 되는 학생이라도 시간을 보내며 기다리면 결국 입학자격이 주어진다. 부족한 학력을 뒤늦게 보충할 필요도 없이 내 차례가 오기를 기다리면 순번에 따라 입학이 가능해지는 희한한 제도 때문이다. 대개 2, 3년간 병원에서 실습생으로 귀중한 세월을 보내고 있다.
다른 사례도 있다. 지난 학기 독일에서 고졸점수 0,7 이라는 전국 최고기록으로 졸업한 학생이 있었는데 그는 하이델베르그 대학 의대에 낙방했다. 1.3 같은 좋은 점수대의 지망자가 많아 일괄적으로 추첨을 한 결과 추첨 운이 부족했던 것이다. 평등사회의 불합리한 단면이다. 독일통일 이전의 동독과 서독의 교육계를 보아도 여러 모로 특징이 나타났다. 모든 분야에서 평등주의를 내세웠던 동독의 경우, 학자들 간에는 경쟁 없는 동일 수준의 봉급체계를 통해 지적 능률 및 평가의 균일화를 이루었다. 이런 상황에서 동독대학이 성과를 낸 유일한 분야는 대학교재 집필이다. 이들이 서독 모든 대학에서 채택할 정도의 좋은 교재를 만들어낸 것은 자기 연구분야에서의 개인적 노력보다 집단작업에 의존한 전형적인 하향평준화의 결과로 보인다. 또한 통독 후 밝혀진 바에 따르면 동독대학들은 서독에 비해 40%의 과잉 인원을 고용하고 있었다. 사회 전반에서 능률과 경쟁을 염두에 두지 않은 결과였다. 이런 교육의 문제 외에 물질적 생산과 소비의 수준에서도 동독정권은 고품질의 승용차 개발을 독려하고 생산 허가하는 대신 거의 원시적인 수준의 2기통 승용차 생산만을 허가했었다. 승용차의 대중적 보급에 어느 정도 기여했을 수는 있으나 장기적으로 기술개발과 사회 발전을 억누른 평등정책일 뿐이었다. 무경쟁으로 인위적인 평준화가 이루어진 사회가 결국 창의력을 잃은 나태하고 침체된 사회로 변질되는 과정은 그 어디보다 공산권에서 표면화된 것이다. 이는 비단 교육계뿐 아니라 기업과 사회전반에 걸친 문제였다는 점에서, 인간이 품고 있는 이상향과 인간본성 사이에 나타나는 모순의 표출이라고 보여진다. [유럽리포트*2009]
2. PISA 결과에 해결방안이 없다
독일은 PISA 히스테리에 병든 나라라고 한 교육자가 평을 한 적이 있다. 이제는 그 정도 수준을 넘어 PISA라는 단어 자체가 패러다임의 전환이라는 의미를 갖게 될 것이라는 예견도 있다. 도대체가 전 세계적으로 독일만큼 PISA에 관심이 많고 그 결과를 절대적으로 신뢰하는 나라도 없다고 한다. 모든 교육문제에서 으레 PISA 없이는 의견개진이 되지 않을 정도다.
왜 유독 독일만이 그렇게 신경과민적 반응을 보이고 있을까? 학교에서 실력평가를 위한 점수 매김이라든가 서열 매김에 심한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던 독일인이 이렇게까지 PISA 결과를 중시하게 된 데는 이유가 있다. 6년 전 1차 PISA시 시험문제가 아시아식의 암기 위주가 아니고 이해력위주의 문제였다는 결론을 얻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물론 더 큰 배경은 독일학제는 더 이상 개선을 요하지 않을 정도의수준이라고 확고히 믿고 있었기 때문에 그만큼 쇼크도 컸던 것이다.
이번 발표된 첫 시험은 Iglu. 초등 4년생 대상으로 읽기와 독해력의 테스트였다. 수년 전보다 서열이 올랐다고 기뻐했다. 더욱이 최상급순위를 차지한 소련, 캐나다 등에서는 아동 가운데 8% 정도를 테스트에 참여 시키지 않았다. 성적을 올리기 위해 국가가 행한 부정행위였다. 독일에서는 정신박약아, 외국출신 이주자 등 0.7%를 제외시켰다. 또한 미국, 네덜란드, 영국 등에서는 학생들에게 현금을 주면서 이 테스트에 참여하도록 종용했다는 것이다. 독일에서는 참가자에게 PISA라고 박혀 있는 기념 볼펜을 나누어 주었다. 그만큼 학생들의 무관심이 컸었나 보다.
과학 분야에서 15세 고교생은 3년 전 중간층에서 이번에는 상위 25%에 올랐다며 경사 분위기였다. 그런데 시험문제가 독일학생들이 강한 환경문제에서 주로 출제되었다는 보도가 뒤따랐다. 이러한 내막을 폭로한 독일인 학자는 PISA 수험 OECD 담당관이다. 이 발표에 대한 독일 측의 분노감도 예외적이었다. 당장 파면을 요구하고 나섰다. 독일이 PISA에 대해 그만큼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다는 방증이다. 수학에서는 3년 전과 큰 차이가 없이 중간 정도에 머물렀다.
3년 전 PISA 이후 교육현장에서 어떤 변화가 있었나하는 질문이 나왔다. 답변은 수 없는 토론과 교사들의 연수를 강화했다는 정도였다. 학생들은 변화를 느끼지 못했다는 답변이었다. 그렇지만 일반적으로 긍정적인 변화가 있었다면 학생들이나 학부모들의 교육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었다는 것이다.
학생들의 성취도보다 더 당황하게 하는 점은 사회 하위층 자녀들과 상위층 자녀간의 실력격차가 유별나게 심하다는 점이다. 바로 이 문제는 좌파에서 가장 중시해온 기회균등의 핵심문제이며 70년대의 교육제도 개혁안도 바로 이 기회균등에 초점을 맞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이제 30년이 지나 PISA라는 외부적인 압력에 의해 비로소 이 제도의 허점을 인정하고 갈팡질팡하고 있는 교육계이다.
OECD 등의 전문가들이 말하는 개선책으로는 진학 학교를 성적별로 세분화하는 현재의 제도보다 모두가 동일한 학급에서 수업을 받도록 하며 전일제를 추진할 것을 제안하고 있다. 정부는 이보다 교사의 질적 향상에 더 큰 비중을 두고 있다. 성적별로 세분화하지 않는다면 이는 바로 40년 전 개혁정신을 역행하는 것이다. 하층 학습능력 부진자를 지원하기 위해 수준별로 분류했었기 때문이다. 어쨌든 단적으로 말해서 교육계는 뚜렷한 묘안을 찾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 한국인의 시각에서 볼 때는 오히려 이 문제에 명확한 해답이 나온다고 생각된다. 독일에서는 5, 6학년에서 하루 숙제는 1시간 내에 끝낼 수 있는 분량으로 한다는 주 문부성 지시가 있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하향평준화로 가는 표본적인 본보기일 것이다.
그렇다면 부모가 가정에서 교육에 도움을 줄 수 있는 상류층 아동과 어쩌면 학교라고는 다녀보지도 못했을 외국인 학부모를 둔 아동이 집에서 숙제를 마친 후 어떤 방법으로 여가시간을 소비를 할 것인가에 대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고답적인 이념에 의지해서는 풀릴 수 없는 수수께끼이다. 그래서 이 문제에 대해 독일 교육계는 구체적인 해결책을 제시하지 못한다. 그들은 침묵을 지키고 있을 뿐이다.
사회적 불평등을 감소시키기 위해서는 누군가가 열정적으로 하층사회 아동들을 돌봐 주는 방법밖에 해결책이 있을 수 없다. 그러나 이러한 이상적인 목표에 자기 여가를 희생할 교사는 70년대에도 아무도 없었다. 국가에는 재정적 여유가 없다. 그렇다고 한국에서는 흔한 학원도 대중화되지 못하고 학습참고서도 없고 학습 TV도 없다. 학생들에게는 그만한 열의도 부족하다. 최근 마인츠시에서 학부모에게 설문한 바에 따르면 고등학교를 보내겠다는 학부모는 50% 정도였다. 노력으로 현재 나의 신분을 탈피하겠다는 의욕이 부족한 것이다. 따라서 공립학교를 신뢰할 수 없는 학부모들은 학교성적이 부진하고 경제력이 허용하면 사립학교로 떠난다.
이제 기회균등을 목표로 이상형이라는 교육개혁을 실행했던 60년대 학자들은 모두 교육현장을 떠났다. 이 어려운 고비를 어떻게 이겨나갈 수 있을지 매우 난감한 상황이다.
[유럽리포트*2008]
3. PISA 결과가 갖는 의미
2000년, 첫 PISA(학업성취도평가) 테스트 결과가 발표되었을 때 독일사회는 전에 없던 큰 쇼크로 받아들였다. 평균치에도 훨씬 못 미치는 바닥권이었다. 그래서 아직도 독일 언론의 PISA에 관한 기사는 의례히 ‘PISA 쇼크‘로 시작되고 있다. 이 성적이 독일에는 너무나 뜻밖이었기 때문이다. 즉 독일은 그간 성취한 교육제도에 대한 자신감과 자만에 빠져 있었다. 특히 70년대부터 불붙은 좌파 편향운동은 교육과정의 개혁방향에 있어 절대적인 영향을 끼친 것이다. 잘 알려져 있듯이 이들은 경쟁이나 엘리트 의식을 억눌렀고 한 걸음 더 나아가 학업평가를 위한 학과시험 폐지를 주장했다. 집에서 하는 숙제도 원치 않았으며 오후에 교과서를 집으로 가져가는 것에도 반대했다. 모든 학생이 동등한 조건하에서 수업을 받아야 한다는 인식이 저변에 깔려있기 때문이다. 이는 인간평준화로 향하는 전제조건이었다. 이 결과가 수 십 년 후 PISA에 나타난 것이다. 그런데 좌파교육에서 나타나는 이런 경향의 분위기가 아직도 이어지는 지역이 있다. 이틀 전 함부르크 녹색당은 교육에 관한 몇 가지 요구사항을 제시했는데 고교생들의 숙제를 폐기할 것을 요구하고 나선 것이다. 그리고 학생들의 부담을 덜어준다는 이유로 필기시험 수는 1주 2회로 제한할 것을 요구했다. 시대착오적인 행태로 보이는 이 내용을 게재하는 언론은 아마도 ‘웃기는 기사’ 정도로 받아들인 듯하다. 이번 PISA 결과에서는 독일이 OECD국가의 평균성적을 넘어섰다고 긍지가 대단해 보인다. 그래서 이제는 ‘PISA 쇼크’가 아니고 ‘PISA 발전(Fortschritt)’ 으로 호칭을 바꿀 수 있겠다는 제안도 나왔다. 지난 10여 년간 독일에 생겨난 과외학습이 역할을 한 만큼 학부모들의 교육열도 상당한 수준에 이른 것으로 보인다. 이번 결과에서 석연치 않은 점도 있다. 그것은 모든 분야에서 1위를 차지한 중국 상하이 학생의 성취도이다. 상하이라면 기업의 중심지로 자연히 경제적으로 여유 있고 학생들도 수준이 높을 것은 당연하다. 한국에 비유한다면 마치 서울의 우수한 일부 구역을 한국의 대표인양 내놓은 것이다. 일개 도시만을 국가대표로 격상시킨다는 독선이 불쾌감을 자아내게 한다. 그러나 이보다 더 문제시해야 할 점은 과연 이 평가가 공정한 조건하에서 이루어졌을까 하는 의문이다. 1차 PISA 시에는 유럽에서는 네덜란드, 스페인 등 몇 개 나라와 아시아지역에서는 인도네시아 등 총10여 개 나라가 부정행위에 참여했는데 이 사실이 공식적으로 공표되었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그다음부터는 부정행위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다는 것이 기이하다. 가장 간단한 부정행위는 평가하는 날 성적이 낮은 학생을 참석하지 않도록 하는 방법이다. 이는 2000년도 첫 번째 테스트에서도 이용된 수단이며 수 일전 슈피겔 지에 게재된 관련기사에도 당연하다는 듯이 이 방법을 언급하고 있었다. 또 여기에는 감시 억제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 과거 PISA 평가가 발표되었을 때 한국 성적은 이번 2012년보다 더욱 높았으며 과목마다 1, 2위를 차지하곤 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국내 전문가들이 거의 무관심한 정도의 반응을 보인 것은 확실히 기이한 현상임에는 틀림없다. 이번 발표된 결과에서는 상하이와 2위국가간의 현격한 차이가 너무 놀라울 정도다. 아마도 첫 번 참여에 부정을 하다 보니 경험부족으로 인해 한계를 정확히 책정하지 못한 것은 아닌가하는 생각이 든다. [유럽리포트*2009]
4. 대학가의 알력
10년 전 독일 대학제도는 전통적인 Diplom을 벗어나 국제규격에 알 맞는 뱃첼러 제도를 도입했다. 이 개혁의 주요 동기는 교육기간이 긴 디플롬 제도 폐지로 수업연한을 단축시킴으로써 국제경쟁력을 높인다는 데 있었다. 그런데 개혁 이후 한 가지 부작용이 나타났다. 뱃첼러 제도의 도입으로 인해 4년제 전문대학(Fachhochschule)과 종합대학이 수여하는 학위의 명칭에서 차별화가 사라진 것이다. 명칭뿐 아니라 각 과정의 수업연한에서도 차이가 전혀 없게 되었다. 논란을 빚게 된 것은 전문대학이 종합대학과 같은 수준에서 박사학위 수여권한을 요구하고 나선 것이다. 원래 전문대학은 수 적으로도 적었으며 입학자격은 일반대학에 비해 한 단계 낮았었다. 고교졸업이 필요요건이 아니었다. 그러나 요즘은 거의 전원이 Abitur를 가진 고교졸업생이 되었다. 마찬가지로 일반대학에도 이제는 고교졸업증 없이도 실무경험 등을 통해 졸업증을 대신할 수 있다. 이 특혜를 이용하는 인원은 많지 않고 대학과정에서 성공률은 높지 않지만 변화의 추세는 확연하다. 두 개의 다른 명칭을 가진 대학과정 간에 모든 분야에서 점차 차별화가 사라져가고 있는 것이다. 단지 수준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전문대학은 실용적인 학과에 그리고 일반대학에서는 기초학문과학에 무게를 두고 있다는 사실이다. 근래 일부 정부 문부성은 전문대학에서도 박사학위 수여권한을 부여하겠다는 뜻을 명백히 했다. 그러나 이에 대한 일반대학 측의 반응은 격렬했다. 독일에는 9개의 일반 공과대학이 TU 9’(Technische Universitaet 9)이라는 연합을 형성하여 자신의 이익을 대변하기 위한 단체로 이용하고 있다. 일반 공대가 전문대의 박사과정도입에 과격하게 반대하는 데는 독일학계의 불편한 심기가 깔려있다. 최근 여러 독일대학에서 박사논문 표절사건이 연이어 폭로되면서 이로 인해 독일학계가 받게 될 외국의 평가는 곤혹스러운 것이 확실하기 때문이다. 알려진 표절사건은 예외 없이 정치인이었으며 인문사회계열에서 일어난 사건이었다. 이것이 대외적으로 독일대학의 학문적 수준이나 학위과정에 대한 평가에 부정적으로 작용할 것은 당연한 것이다. 또한 이공계 교수의 연구비 여건을 보면 일반대학에서는 1명 교수가 42만 유로를 보유하고 있는 반면 전문대에서는 13만 유로 정도다. 이런 조건하에서 전문대학이 박사과정을 도입한다면 외국에서는 독일대학이 박사학위를 양산하려는데 대해 이를 아무도 이해하지 못할 것이라고 TU 9 대표는 강조했다. 만약 전문대학의 박사과정이 일반대학과 공조 하에서만 가능하다면 결국은 전문대는 일반대학에 종속되는 기이한 결과를 낳게 될 것이라는 우려의 목소리도 있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박사학위의 가치를 떨어트리게 될 것이라는 지적이다. 또 독일대학위원회는 전문대에게 박사학위수여 권한이 허용된다면 이는 막스 플랑크 연구소나 기타 대학 외 연구기관이 학위 수여권을 요구 시 이를 거부할 수 없을 것이라고 독일대학위원회는 언급했다. 독일 의과대학에서는 전통적으로 박사란 거의 모든 학생이 박사논문을 쓰는 형식에 지나지 않는다. 자칫 공과대학에 박사 인플레 시대가 오지 않을지 주목된다. [유럽리포트*2012]
5. 교육 하향평준화의 길?
독일교육계는 전 후 교육제도에 관한 한 자신만만했다. 이는 아마도 다른 나라의 교육제도 및 외국학생들의 학업성취도와 직접 비교할 수 있는 기회가 전혀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독일 내부적으로도 교육의 성취도를 비교하며 랭킹을 따지는 행위는 용납되지 않는 분위기였다. 특히 60년대 말부터는 사회의 좌경화 물결에 휩쓸려 교육의 방법론은 여러 각도에서 실험대상에 올라 혼란스러웠다. 여기서 교육계에 처음으로 쇼크를 준 것이 10여 년 전 첫 PISA 결과였다. 이 PISA 결과를 통해 독일 국내적으로는 또 하나의 중대 사실이 알려졌다. 놀랍게도 남쪽지역(바이에른, 바덴뷔르템베르그)의 학력수준은 북쪽 지방에 비해 심지어 2년이나 앞서 있다는 놀라운 사실이다. 즉 좌파에서 갈망하던 평준화, 평등화와는 정반대되는 결과가 나타난 것이다. 이런 상황 하에서 한국의 수능시험 같은 전국 종합적 학력고사는 시행되지 못하고 있다. 성적이 뒤지는 주 정부가 이런 저런 이유로 이에 참여하기를 거부하고 있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독일인은 특수한 경우 외에는 학교 성적에 큰 관심을 두지 않는다. 그런데 요즘 문제시 되는 것이 대학입학이다. 의과, 치과, 수의과, 약학, 심리학과는 지망생이 대학정원을 초과하는 과목이다. 그러다 보니 이 학과 지망자에게는 입학 전형에서 졸업성적이 가장 중요한 비중을 차지한다. 그런데 여기서 갈등이 생기는 것이 바로 위에 지적했듯이 나의 주거지에 따라 학력 차이가 뚜렷하다는 사실이다. 즉 남쪽의 최고점인 1점과 북쪽의 1점과는 학력에서 큰 차이가 크게 나타난다는 것이다. 대학입학 (Zulassung)을 전국적으로 관할하는 기관에서는 이 사실을 참작하여 남쪽 지방 고졸(Abitur) 성적에는 가산점을 주어 입학에 참작하였다. 그러나 이런 제도(?)가 누구에나 납득이 갈만큼 만족스럽고 신빙성있는 제도가 아닌 것은 당연하다. 여러모로 불만이 나타난다지만 별다른 해결방안은 없었다. 여기서 학교측이 고안해 낸 대안 역시 매우 비합리적인 방안이다. 학생들의 졸업성적을 후하게 주는 방향으로 기울기 시작한 것이다. 물론 이러한 경향은 수 년 전부터 학력수준이 높은 남부 지역에서 주로 나타나고 있다. 그 방법은 여러 가지다. 문제가 쉬워지는 경향이 뚜렷해 졌다. 어떤 교사는 필기시험 (Klausur)을 숙제로 대신하기도 한다. 시험을 앞두고 학생들을 상대로 종합 총정리를 해주는 경우도 나타났다. 요즘은 졸업성적을 공개하는 관례가 늘고 있다. 성적이 좋다면 일단 교장선생님도 만족할 것이며 학부모에게도 역시 가장 큰 관심사이다. 이런 문제로 한 교장선생님의 도를 넘은 경우도 있었다. 바이에른의 코부르그라는 중소도시 고등학교의 교장선생님은 독어담당이었다. 그는 전체 학생의 독어점수를 일률적으로 1점씩 상향 조정해주는 선심을 보였다. 물론 그는 책임을 지게 되었지만 점수조작이 일반화되어 있음을 보여주는 실례이다. 앞으로 이러한 교육계의 경향을 돌이킬 수는 없을 것이다. 장기적으로 남북의 하향평준화는 피할 수없는 결과로 나타날 것이 아닐까? [유럽리포트*2012]
6. 독일 노벨 수상자는 왜 문제인가?
노벨 의학상에 독일인이 수상자로 지명 되었다. 독일 언론에서는 30년 간 미국에서 연구를 계속해 온 쥐드호프를 독일인으로 오인(?)하여 크게 보도했지만 독일이 이 상황에서 자랑스러워 할 수 있는 것일까? 독일은 오히려 지금 수치감을 가져야 하지 않을까? 노벨상이 인간지능의 우위를 비교하는 상이라면 독일인의 우수성을 자랑할 만하다. 그러나 이보다는 왜 독일인이 독일에서 노벨상을 탈 수 있는 연구업적을 얻을 수 있는 여건을 갖지 못하는가에 관심이 쏠려야 한다. 쥐드호프는 독일에서 학위과정을 마치고 30년 전부터 미국에서 연구하고 있다. 그는 또 이미 미국국적 보유자가 되었다. 미국에는 연구목적으로 독일에서 온 학자가 많다. 이들은 독일에서 보다 더 좋은 여건을 찾아 미국을 택한 것이다. 최근 통계로는 경제학계에만도 300명의 최상급 학자들이 미국에서 활약하고 있다고 한다. 독일이 안고 있는 병인을 찾아본다면 첫째 꼽을 수 있는 것이 독일의 평준화된 제도다. 평준화는 평준화 된 업적을 내는 데는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게다가 만성적인 재정궁핍에서는 헤어날 수 없는 상태다. 학생 수가 증가하면서 교수들의 시간적 부담은 점차 커져간다. 연구보다 관료적인 행정업무에 매달리고 있는 실정이다. 지금까지 독일대학에서 노벨 수상자수는 손꼽을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지난 30년간 수상자 수는 영국에 비해 훨씬 뒤지고 있다. 그 원인은 제도에서 찾을 수밖에 없다. 지난 선거전에서 녹색당은 교육비 증가를 내세웠지만 이런 정책을 찾기 위한 포퓰리즘적인 정치인의 발언에 아무도 기대를 두지 않는다. 독일 정부는 쥐드호프를 독일인이라고 보고 있다. 그는 독일 여권연장을 포기하고 미국국적을 받았다지만 독일시민권 포기를 하지 않았다는 것이 정부의 해석이다. [유럽리포트*2012]
7. 독일 남북 경제력의 격차
어떤 국가에서나 지역에 따라 경제력의 차이, 빈부의 차이가 없을 수 없다. 그러나 독일에서 나타난 지역격차는 그 원인을 해명할 수 없다는 점에서 특징적이다. 그런 덕분에 학계에서까지 연구대상이 되고 있다. 매우 드문 일이다.
70년대 까지만 해도 독일경제의 중심은 북부에 집중되어 있었다. 우선 공업을 뒷받침하는 광산지역이 북쪽에 자리 잡고 있었고 함부르크를 위시한 북부 항만지역은 무역 중심지의 역할을 독점하고 있었다.
이에 비해 독일의 남부지역은 보수적이며 가톨릭이 강하고 가난한 농촌지역이라는 이미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남부 지역이라면 슈투트가르트가 수도인 하이델베르그, 칼스루헤 등이 있는 바덴 뷔르템베르그(Baden-Wuerttemberg) 주와 뮌헨에 수도를 둔 바이에른 주(Bavaria 주)를 꼽는다.
70년대 말에 들어오면서부터 남북의 여건이 바뀌기 시작했다. 광산지역의 경제적 비중이 상대적으로 약화되기 시작했다. 또한 생활여건이 질적으로 향상되면서 남부지역이 갖는 지리적인 장점이 돋보이기 시작했다. 남쪽으로는 알프스를 끼고 있는 이태리, 스위스 등 레저 관광지역이 인접해 있어 여름, 겨울을 막론하고 생활을 즐길 수 있는 유리한 지리적 조건이 주어졌다.
경제력의 차이
80년대부터 각종 통계자료에 드러난 남과 북의 경제력의 격차는 놀라울 정도였다. 대표적인 한두 가지 경제 데이터만 이 자리에 소개해본다.
인구 1인당 BIP를 보면 남쪽의 BW 주는 30.500유로, 바이에른 주는 32.100 유로인데 반해 북부의 Nordrhein-Westfalen 주(루르지방)는 27.100유로, 라인란드 팔츠 주는 24.200유로에 지나지 않는다.
기초생활수급자의 수는 1천명 당 남쪽의 BW 주 40, 9명, 바이에른 38,7명인 반면 북쪽 지역인 베를린은 143명, 루르지방은 76,6명, 함부르크는 104명에 달한다.
즉 남과 북이 빈부의 격차로 뚜렷하게 차별화됨을 볼 수 있다. 지방자치제에 의한 예산분배에서 프랑크푸르트가 있는 헷센 주와 앞의 두 개 주에서 독일의 나머지 전체 주에 재정지원이 이루어진다.
그 원인을 찾으려는 노력
이와 같이 경제력에서 남북간의 현격한 차이가 생겨난 이유를 어디서 찾을 수 있는 것일까? 이에 대한 궁금증은 이미 80년대부터 이어졌다. 학자들의 논란이 뒤따르면서 ‘시계가 남쪽에서는 다르게 가는가?’ 라는 질문이 나오기도 했다. 그만큼 해답이 미궁에 빠져 있다는 이야기다.
몇 년 전 남북의 격차를 학문적으로 다룬 저서가 출간 되었는데 여기에서는 바이에른 주의 사회구조 내지 사회문화적인 성격 등이 논의되며 지역적인 ‘특수한 의식’의 탓이라는 지적이 있었다. 농촌의 독특한 환경, 가톨릭 신자의 비율이 높다는 사실, 타 지역에 비해 뒤늦게 공업화가 시작되었다는 사실 등이 나열되었지만 학자들은 이러한 의미를 과대평가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지적한다. 또한 수십 년을 장기 집권하고 있는 보수계인 CSU (Christlich Soziale Union: 전 후 바이에른 장기 집권당)의 성공스토리는 구체성을 띤 정책을 펼친 덕분이라는 주장도 있었다.
이와 같이 학자들이 명확한 해답을 찾지 못하고 있기는 BW 주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학계에서 내놓는 해석은 상식수준을 넘지 못하고 있다. 이 BW 지역 사람들의 타고난 근면성과 창의력, 하이테크와 생활의 질의 겸비, 2차 대전 후 폴란드 지역에서 추방되어 온 독일난민들의 근면성 등이 나열되고 있으나 여전히 핵심적인 요인을 발견하지는 못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남북간의 한 가지 차이점은 정치성향에서 찾아 볼 수 있는데 우선 남부지역의 특징으로는 보수당이 장기집권 하고 있다는 사실을 들 수 있다. 2차 대전 이후 바이에른(Bavaria 주)주와 BW 주는 연속해서 보수당인 기민당과 기민당의 자매당인 기독교사회당이 연립으로 집권하고 있다.
위에 소개한 경제력의 차별화 외에도 남부지역에는 두 가지 돋보이는 점이 있는데 그것은 외국인정책과 교육정책이다. 그리고 이 두 사례는 이념적인 배경으로 한 해석이 가능하다는 점에서 우리의 관심을 끌만 하다.
외국인정책을 보면 문제의 초점은 현지적응 문제와 관련 된다. 좌파는 외국인에 대해 필요 이상의 관대함을 보였는데, 실질적으로는 관대함을 넘어 외국인은 무관심상태로 방치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특히 전쟁난민을 위주로 한 외국인의 입주에만 초점을 두었을 뿐 이에 수반되는 문제점에 대한 관심과 배려가 없었다. 그리고 다문화 (multikulturell) 사회의 형성을 외국인정책의 성공적인 표본으로 간주했다.
9.11 테러 이후 비로소 독일의 외국인 정책에 각성과 전환점이 되는 계기가 되었다. 특히 테러범들이 독일대학생 신분이었다는 사실은 매우 충격적으로 받아들여졌고 다문화사회의 실패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또 한 가지 남북의 차이점이 두드러진 분야는 교육 분야이다. 교육에서 남북의 차이가 가시화된 것은 PISA 결과를 통해서였다. 이 결과는 지방별 채점을 하면서 더욱 명확히 드러났다. 가장 광범위한 연구는 베를린 훔볼트 대학의Lehmann교수 주도하에 이뤄졌다. 그것은 1995년부터 북부도시 함부르크와 BW 주의 초등학교 5년생을 무려 9년간에 걸쳐 비교 연구한 자료였다. 이미 남북의 일반적인 격차에 대해서는 잘 알려져 있었기 때문에 당시 함부르크 교육위원회가 이 비교 테스트에 동의한 것 자체가 놀라운 일이었다고 레만교수는 회고했다.
결과는 놀라웠다. 우선 고등학교에서 수학 선택반 학생의 성적을 수치로 비교해 보았다. 여기에서 함부르크보다 BW는 78점이 더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40점은 1년 간 학습한 분량에 해당한다. 즉 BW 주 학생들은 함부르크시의 학생에 비해 무려 2년의 수업을 더 받은 만큼의 실력 격차를 드러낸 것이다. 남부지역 학생들이 월등하게 성적이 우수하다는 사실은 PISA 결과 밖에도 여러 조사에서 확인 된 바 있다. 이와 같이 실력차이가 드러날 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북부 지역 주는 종합수능시험을 노골적으로 거부할 정도이다.
대학의 경우 역시 마찬가지이다. 2006년과 2007년에 정부는 대학에 연구비지원을 위해 - 소위 엘리트대학 육성이라는 명목으로 – 연구프로젝트 선발을 했다. 여기서 2006년에 선정된 대학은 남부 독일 두 개 주에 있는 3개 대학뿐이었다. 결국 2007년에는 국가에서 계획적으로 타 지역의 대학도 일부 선정대상으로 정할 수 밖에 없었다.
우리의 눈에 띄는 것은 외국인정책과 교육정책을 통해 이념 지향적인 좌파정책의 실체가 드러난다는 것이다. ‘이념 지향적’의 특징을 꼽는다면 이들은 큰 것. 거시적인 것, 즉 ‘이데올로기’에 도취되어 있어 세부적인 미시의 세계를 경시한다는 공통점이 있다는 것이다.
즉 독일에 외국인이 다수 유입되어 거주하고 있다는 사실에만 도취되어 있었고, 30년 전 도입된 교육개혁이라는 새로운 제도를 창출했다는 자부심에 도취되어 세부적인 상황변화에 적응하지 못했다. 변화란 미시적인 의식의 변화가 첫 걸음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남북지역 간 경제력의 차별화역시 이념적인 특성과 연계시킬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유럽리포트*2010]
8. 전문대와 일반대의 차이
전문대 설립 후 초기에는 졸업 학위명칭에 이어 괄호 안에 FH (Fachhochschule)라고 명시하게 되어 있었다. 그러나 최근 대학과 전문대 졸업학위 명칭이 벳첼러와 디플롬으로 차이가 완전히 제거되면서 적어도 외관상으로는 전문대와 일반대간에는 전혀 차이가 없게 되었다. 단 한 가지 과정상 차이가 있는데 전문대에서는 박사과정을 택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이 차이가 처음으로 Schleswig-Holstein 주에서 사라진다. 주문부성 장관이 이 변경사항을 추진하기로 했다. 따라서 다른 주에서도 점차적으로 차등화가 없어질 것으로 예상된다. 그간 여러 전문대에서 이 제도상의 차등화에 대한 불만이 높아가고 있었는데, 이 주에는 Kiel 대학과 Luebeck 대학이 일반 대학이며 그밖에 여러 전문대학이 있다. [유럽리포트*2012]
9. 기업의 부패규정
사업상 관계로 간단한 선물을 하게 되는 수가 있다. 그런데 지멘스 사건 이후 법 적용이 까다로워졌다. 기업에서는 Compliance 구조라고 한다. 법적 규정에 윤리적인 관점도 포함시켰다. 그렇지만 어느 정도의 선물이 허용기준에 속하는가는 여전히 논란거리이다. 연방공무원들은 25유로 이상의 가치가 있는 물품에 대해서는 상사의 허락 없이 받을 수 없다. 베를린 검찰은 더 엄격해서 5유로가 넘으면 수사대상이 된다. 사기업에서는 35유로를 한계선으로 하기도 한다. 안전하게 하려면 상급자에게 보고해야 한다. 식사대접은 까다로운 사안이다. 기업에 따라 35 내지 50유로 선이다. 외국 체류중에는 더욱 까다로워진다. 좋은 선물을 사양했다가 예의에 어긋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유럽리포트*2013]
10. 독일 남북격차에 대한 새로운 해석
독일의 남북간 경제력격차에 관해 이번에는 동독 예나(Jena)대학 사회학 교수가 새로운 해석을 발표하여 주목을 끌고 있다. 경제력뿐 아니라 학문수준과 교육수준에서까지도 생긴 남북간의 격차라는 사회현상에 대한 학자의 관심이다. 그의 요점은 남쪽 사람들은 자기 생의 문제를 스스로 개척해 나가는 정신이 투철한 때문이라는 주장을 내고 있어 앞으로 흥미있는 논쟁거리가 될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즉 멘탈리티의 차이로 인해 남북이 차별화되었다는 것이 힐데브란트 교수의 지론이다. 직장에서 보나, PISA 결과를 보나 대학수준을 보나 각 분야에서 예외 없이 남부 독일인은 자립정신이 약한 북부 독일인에 비해 우수성을 발휘하고 있다고 그는 지적한다.
원인을 그는 역사적인 배경에서 찾는다. 2차 대전까지 북부 독일인들은 프로이센 지주들의 소작인으로 일해 왔다. 이는 독창성이란 요구되지 않는 작업으로 이들은 마치 ‘내버려졌다는 감정 (Gefuehl von Ausgeliefertsein)’을 소유하게 된 것이라고 그는 표현했다.
이에 비해 남부지역의 농민들의 배경은 달랐다. 남부에는 중소 농장이 많아 자립적으로 일하는 습성에 익숙했다. 게다가 소규모농장은 수확이 넉넉하지 못해 농부들은 다른 수입원을 찾아야했다. 즉 공장에서 일하거나 창업을 하기도 했다.
힐데브란트 교수는 자기 지론에 대해 확신을 갖고 있다.
‘이 역사적인 발전과정이 오늘까지 시민의 생활방식이나 사고양태에 영향을 남긴 것이다. 그간 사회구조는 변했으나 인간의 멘탈리티에는 변화를 미치지 못했다.’ 한 가지 예로 북부 독일에는 아이들 방에 TV 대수가 훨씬 많은데 이는 북부에서 부모들이 아이들과 보내는 시간이 적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해석한다.
이 주장에 대해 베를린대학 놀테 교수는 전혀 근거 없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특히 경제발전에는 문화적인 요소가 상당한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힐데브란트 교수의 주장에 대한 반론도 있다. 역시 베를린대학 겔퍼트 교수는 신빙성이 없어 보인다고 평하며, 역사적 사건이 멘탈리티에 영향을 주는 것은 사실이지만 북부 독일인이 자립성을 잃은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북쪽에는 신교 기독교인이 다수인데, 이들은 종교관의 영향 하에 생산적이며 개인주의적인 특성이 있다는 사실을 지적했다. [유럽리포트*2013]
11. ‘빅뱅에서 빅 쇼로’
인간이 품고 있는 우주에 대한 물음은 인류가 존재해 온 이래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다.
20세기 초인 20년대까지 우주는 변화하지 않는 정적인 존재라고 믿었다. 그러나 처음으로 과학적인 실험결과를 통해 우주가 팽창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팽창의 속도는 은하가 멀수록 더 증가하고 있었다. 영국의 천체물리학의 세계적 권위인 호킹은 우주 팽창의 속도를 동전의 크기에서 1의 마이너스 30승 초에 은하 넓이의 천만 배로 팽창한다고 했다. 어쨌든 Hubble이 스펙트럼 분석으로 얻은 이 우주팽창설은 우주과학 이해의 전기를 이룬 셈이다.
여기서 이 우주의 팽창과정을 반대 방향으로 돌이킨다고 가정해 볼 수 있겠다. 그러면 우주는 계속 축소되어 원점에 접근하게 될 것이다. 즉 우주의 근원인 이 미소 점은 상상하기 힘든 정도로 작으면서 무한에 가까운 큰 비중과 열 에너지를 보유하고 있을 것이다. 즉 이 특이점(singularitaet)은 우주의 모든 에너지가 집중되어 있는 점이다. 원점과의 거리는 10의 마이너스 35승 미터(Planck 기리)라는 상상조차 하기 힘든 단위로 축소된다. 그러나 '0'에 이를 수는 없다. ‘0’ 에서는 공간이 곡선을 그리며 압력과 온도는 무한으로 증가한다.
우주의 폭발과 팽창은 생성과정과 원인을 알 수 없는 이 ‘에너지 뭉치’ 의 폭발로부터 시작되었다고 보는 것이 빅뱅 이론이다. 이때가 우주의 존재가 시작되는 순간이다. 시간과 공간도 동시에 생성되기 시작했다. 그것은 137억 년 전이었다는 결과도 나왔다. 이 빅뱅 이론에 대해서는 네 가지의 강력한 과학적 증거가 있어 전반적으로 인정되고 있지만 반론도 일고 있다. 2004년 『New Scientist』지에는 빅뱅이론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론에 많은 학자들이 서명한 일이 있었다.
관심의 초점은 이 대폭발의 초기 단계에 집중되어 있다. 빅뱅의 원인 즉 우주생성의 근원에 대한 의문과, 이와 직결되어 빅뱅 이후 첫 1초 혹은 10초 이내의 의문을 밝히려는 것이다.
우주생성에는 신의 의지가 개입되었다는 이론이 있는가 하면 ‘무(Nichts)’에서 생성되었다는 이론도 있다. 이 후자는 양자 효과(물질의 미시의 세계를 다루는 Quanteneffekt)로 우주생성을 설명하는 것으로 이는 공간과 시간이 없는 상태에서 에너지를 생성시켰다는 초자연적인 힘으로서의 신의 의지를 배제한다. 이는 양자역학의 터널효과 - 일부 입자가 에너지가 부족해도 높은 에너지장벽을 넘는다는 - 와 양자요동 등을 통한 우주 생성론이다.
또 여러 우주의 공존설이 있는가 하면 두 개의 우주론도 있다. 호킹은 마치 끓는 물에서 거품이 생겨나 일부 사라지기도 하고 혹은 점차 커질 수 있는 현상과 우주탄생을 비유한다.
위에 소개한 물리학자들의 서명운동은 천체물리 전반에 대한 회의론을 제기한 것이어서 큰 의미가 있다.
독일에서 최근 한 이론물리학자의 저서가 파문을 일으키고 있다. 현재 뮌헨에서 고교교사로 있는 필자 운찌커(Unzicker) 박사는 다년간 천체물리학자로 활약했었다. 그의 저서는 천체물리학 전반에 대한 비관적 회의주의에 싸여 있다. 그의 반론은 다각적이다. 300여 단원으로 간략하게 천체물리 전반에 대한 비판적 논평을 가하고 있다.
그는 ‘집안망신을 시키는 자(Nestbeschmutzer)’의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Vom Urknall zum Durchknall』이라는 책의 표제 역시 도전적이다. 빅뱅은 독어로 ‘Urknall’로 번역된다. 원초적 폭발이라는 뜻이다. 이 제목은 ‘빅뱅에서 빅 쇼로’라는 번역이 적합할 수 있겠다. 이론물리에 대한 근본적인 불신감이 깔려 있는 저서이다.
태양계에서 테스트한 이론을 전 우주에 확대 응용한다는데 무리가 있다는 주장을 펴며 양자이론(Quantentheorie)에 대해서도 같은 의문을 제기한다. 미시세계에 적용되는 이론을 우주현상에 적용한다는 데 대한 회의적 시각이다. 앞으로 우주 생성이론을 종합적으로 해결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는 ‘M- 이론’ 에서도 혼란스럽기는 마찬가지다.
호킹에 따르면 우리의 우주는 ‘무’에서 생성된 많은 우주가운데 하나일 뿐이며 이러한 결과는 물리법칙, 즉 자연과학에 기초한 예측에서 나온 당연한 결론으로 본다. 그리고 이러한 창조에는 초자연적인 존재의 개입을 요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저자는‘천체물리학에는 점성술에 맞먹는 웃기는(laecherlich) 헛소리가 많다’는 혹평을 가하기도 한다. 이론물리학의 결과를 과학 공상소설과 비교도 하고 있다. 예로 빅뱅이론의 핵심을 이루는 폭발에 의한 배경복사(Hintergrundstrahlung)의 마이크로웨이브 파는 빅뱅 초기의 불덩어리에서 나온 수소와 헬리움이 – 당시에는 원자의 구조조차도 없는 상태였다 – 100억년( ! ) 이상이 지난 지금 측정기에 도달했다는 사실에 소름을 끼친다고 서술하고 있다.
그의 저서는 국제학술회의나 개인적인 접촉을 통해 학자들과 대담을 한 내용 혹은 학술논문에 대한 자신의 해석과 회의적인 견해를 피력해 놓은 단편집이다.
여기서는 수학적 결과가 자신의 현재 모델과 일치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배제된다. 이론적인 계산에 사용되는 많은 모델은 점차 복잡해지고 있으며 의미를 알 수도 없는 수식으로 바뀌어 간다. 입증이 안 된 가설이 나타나고 임의로 선택될 수 있는 파라미터는 자기 주장에 부합되는 것으로 선택되어 이론구성에 뒷받침이 된다. 저자는 ‘초끈이론(Stringtheorie)’ 을 종교와 비교하기도 한다. 이론에 바탕을 둔 계산의 결과가 아닌 믿음의 소산이라는 것이다.
심각하게 받아들여질 만한 저자의 반론도 있다. 그것은 열역학이나 핵물리학 법칙이 빅뱅이 일어난 당시에도 유효했다고 가정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얻어진 결과는 정확성이 결여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저자는 오늘날 이론물리에 대한 근본적인 불신감이 일고 있다고 말한다. 이제 이론물리가 막다른 골목에 달했고 학문의 영역을 벗어나는 환상에 가깝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학자들의 헛소리 같은 결과를 신뢰하지 말고 읽으면서 스스로 사고하라는 것이 그의 충언이다.
물리학이 불만족스러운 결과를 낳고 있는 현실에서 우주의 궁극적 비밀을 탐구하려는 인간지능의 한계를 엿볼 수 있다는 점은 오히려 충분한 의미와 시사점을 품고 있다고 생각된다. [유럽리포트*2013]
12. Wagner 축제의 이변
독일에서 가장 화려하고 전통 있는 음악제는 바이로이트 바그너 축제(Bayreuther-Wagner-Festspiele.de) 이다. 매년 여름 휴가철이 시작되는 계절에 바그너가 100여 년 전 직접 건립한 바이로이트의 Festspielhaus에서 열리는 금년 103회째의 축제이다. 축제와 관련하여 관심을 끄는 사항이 있다. 우선 바그너 집안 후손들 간에는 연출, 감독, 운영 등을 에워싼 사안에 대해 끊임없는 알력이 이어지고 있다는 사실이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마치 기사거리 부족으로 고민하는 대중지를 위해 쇼를 꾸며나가는 듯한 인상을 주기도 한다. 또 다른 문제점은 입장권을 둘러싼 논란이다. 비싼 가격이 형성된 것은 그만큼 수요가 큰 때문이다. 일반인은 10년은 기다려야 입장권을 구할 수 있다는 주장이 과장이 아니었다. 실은 입장권의 가격(40 ~ 300 유로)이 문제시 된 것이 아니라 표가 어떤 루트를 통해 분배되는 것인지 투명성있게 공개된 사안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결국은 연방감사원 감사를 거치고 내막이 공개되기 시작한 것은 불과 2년 전이었다. 입장권은 바이에른 주 노조에도 일정 매수가 증여되었는데 100여 년 전 음악당 건축시 노조의 노고를 치하하기 위함이다. 또한 입장권의 40%는 인터넷을 통해 판매되고 일부는 여행사에도 배당되었으나 이 역시 금지되었다. 노조에 배분된 입장권의 상당량이 암시장으로 나돌아 원가의 700%까지도 호가되었기 때문이다. 1876년 첫 축제에는 황제 빌헬름 1세와 외국 왕을 위시해서 프란츠 리스트, 차이콥스키, 브룩크너, 톨스토이, 니체 등 당대의 유명인사들이 다수 참석했다. 이 전통이 이어지면서 지금까지도 수상이나 정계 인사, 연예계 등에서 언론을 타는 인물들의 의상이 대중지의 주요 보도자료가 되어 왔다. 그러나 관객 중에는 한량들도 다수 섞여 있어 1막이 끝나면 자리를 떠나는 ‘이벤트 관객’이 상당수가 된다고 알려져 있다. 이러한 추잡한 환경이 언젠가는 폭발할 듯한 분위기를 조성해온 것이 사실이다. 현대 독일 사회정서에 어울릴 수 없는 양태가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 변화의 첫 장면이 작년에 이어 금년에 더욱 뚜렷해졌다. 우선 메르켈 수상이 나타나지 않았다. 그리고 10년 대기해야 구한다는 첫날 입장권이 남아돌고, 인터넷에는 고가 입장권을 팔겠다는 암시장이 크게 형성되고 있다. ebay에는 심지어 원가 이하 가격으로 입장권이 나돌고 있다. 바이오 가스 생산지가 연출 장면으로 나타나고 마피아와 칼라슈니코브 기관단총이 난무하는 탄호이저를 감상하며 100여 년 전 음악의 정신세계와 오늘날의 세계를 연계하는 혼돈을 겪어야 하는 장면이 벌어진다고 한다. 금년에는 정말로 보도할 내용이 없다고 쓴 언론기사가 실소를 머금케 한다. [유럽리포트*2013]
13. G8, G9의 선택
13년제인 독일고등학교 Gymnasium(G9)을 고등학교 8년제인 G8로 1년 단축하는 개혁안은 독일에서 가장 혁신적인 교육개혁안에 속한다. 이는 대학과정을 뱃첼러와 마스터 제도로 변경하면서 때를 같이해 이루어지고 있는 개혁이다. 지금 와서 이 제도개혁을 급진적으로 실천에 옮기게 된 계기는 20년 전부터 번져간 세계화로 인해 위기감을 느끼게 된 때문이다. 고등학교 제도는 이미 바이마르 공화국 시대부터 초등학교 4년과 고등학교 9년으로 규정되었었다. 그 후 1936년 히틀러는 고등학교를 12년으로 1년 단축했는데 이는 고졸생을 장교후보생으로 빠른 시일 내에 군에 입대시키기 위한 군사적 목적에서였다. 전 후에 서독은 다시 13년제로 돌아가고 동독은 12년제를 유지해 왔었다. 즉 지금의 개혁으로 김나지움이 100년 만에 8년제가 된 것이다. 정부의 조건은 학과과정과 내용에서는 개혁 전과 차이가 없어야 한다고 못박았다. 결과적으로 수업을 더 강화한다는 뜻이다. 이와 같이 G8 반이 전반적으로(1개주만 제외) 도입되었으나 예상외로 개혁안에 대한 반발이 심해져 갔다. 반대이유는 첫째 학생들의 학과부담이 과중하다는 것이었다. 오후에 운동이나 기타 자기 취미생활을 하기 위한 여가가 부족하고 학과부담의 증가로 이해중심이 아닌 주입식 교육방법으로 바뀌고 있다는 –이런 불만은 대학에서도 마찬가지다- 점이 지적되었다. 이 압력으로 호황을 누리는 업종이 동네마다 세워진 소규모 학원들이다. 교육계뿐 아니라 학부모, 정계까지도 찬반 양파로 갈라졌다. 학부모들은 데모도 하는 등 반대운동이 거셌다. 헷센 주의 경우를 보면 학부모의 무려 80%가 9년제를 찬성하고 나섰다. 결국 주 내 107개 고등학교 가운데 39개 학교는 다시 9년제로 되돌아가고 말았다. G8 과정과 G9 과정을 병행해서 도입한다는 기발한 아이디어를 제안한 학교도 나타났다. 학생들이 각자 희망과 능력에 따라 8년에 마치거나 아니면 9년에 마치는 자율 선택안을 제시한 것이다. 매우 합리적이며 실용적인 제도인 듯 하지만 실제로는 장애요소가 클 수 밖에 없다. 프랑크푸르트 근교에서 G8와 G9을 병행할 계획이던 한 고등학교는 6개의 추가 교실수요를 해결할 방법이 없어 이를 취소해야 했다. 기업측에서는 8년제를 적극 지지하고 나섰다. 이 배경에는 교육이란 평생교육의 시대라는 의식이 깔려있다. 첫 단계 교육과정을 줄이고 취업 후 석사과정을 이수하는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독일 인구감소 역시 8년제를 지지하는 이유로 꼽힌다. 장기적인 안목에서 볼 때는 8년제가 관철될 것으로 교육학자들은 보고 있다. 그러나 지금의 상황에서 혼란을 끼칠 소지가 되는 것은 타 지역으로 전학을 하는 경우 부딪치는 문제들이다. 앞으로 몇 년이 지나면서 종합적인 평가가 있겠지만 8년제가 수반하는 장점이 학생들 자신을 위해서나 국가적으로 큰 이익이 될 것은 확실하다. 우선 학생들은 더 극심한 경쟁의식과 스트레스 속에서 헤쳐 나가는 훈련을 거치는 셈이다. [2014년]
14. 과잉 생산되는 문학작품
곧 세계 최대 규모의 프랑크푸르트 서적 전시회가 문을 연다. 모래알같이 많은 신간 전시장 틈을 거닐고 나올 때면 모든 방문자들에게서 지친 모습을 역력히 찾아볼 수 있다.
출판사의 과잉생산이 그 원인이 아닐까? 도대체 신간서적의 양은 어느 정도 되는 것일까? 지난해에는 12만권이 전시되었다. 독일어권에서 출판된 문학 계열 서적은 1만4천권이었으며 이중 약 절반, 즉 7천권이 신간 소설이었다. 이 막대한 양의 7천권 가운데 단 10%를 읽어 볼 가치가 있는 소설이라 가정하더라도 1년간을 쉬지 않고 하루에 두 권씩을 소화해야 어느 정도 소설분야를 이해했다고 말할 수 있는 정도다.
신간은 수개월이 지나면 판매 리스트에서 사라지고 만다. 영원히 기억에서 지워져 버리는 것이다. 신간의 수가 많을수록 회전속도 역시 빨라진다. 마치 새로운 기계가 시장을 점령하듯이. 그럴수록 문학작품의 세계에서는 고전의 의미가 더욱 중시되기 마련이다. [유럽리포트*2014]
15. 독일식 짠돌이의 성공담
독일에서 제일가는 갑부 10명을 꼽으면 3위까지의 순위에는 독일을 주름잡고 있는 디스카운트 식품 마트(Aldi와 Lidl)가 포함돼 있어 이색적이다. Aldi라는 체인은 두 형제가 운영하면서 독일을 남북 지역으로 분리해서 운영하고 있다. 이들이 독일에서 1, 2위 갑부이며 3위 역시 Lidl이라는 저가 식품 체인 운영자다. Aldi 운영 형제는 2차 대전 시 미군과 소련군 포로에서 석방된 후 집안의 소규모 식품점을 인수받아 공동 운영했다. 초기에는 운영자금 부족으로 식품종류를 늘리지 못했다. 그런데도 장사가 잘 되자 그들의 첫 운영 아이디어가 싹텄다. 품종확대가 우선이 아니라 제한된 상품 종류이지만 질 좋고 값싼 식료품을 공급한다는 것이었다. 지극히 평범한 이 경영방식을 60년간 이끌어 가면서 독일 제일가는 갑부까지 올라선 이들 형제에게는 또 하나의 특징이 있었다. 신앙심 깊은 가톨릭 신자인 이들은 너무 검소한 수전노 생활을 했다. 지난 달 사망 시까지 그가 찍은 사진이라곤 1970년대와 80년대 각기 한 장 뿐이었다. 대외적인 접촉도 알려진 사례가 없다. 그는 거주도시 엣센 시 공동묘지에 가족용 묘지를 위한 작은 땅을 샀었다. 그런데 몇 년이 지나도록 손질을 하지 않자 시 당국이 경고장을 보냈다. 그의 변명은 자기 상점 Aldi에서 꽃과 식물이 세일 값으로 나올 때를 기다리고 있다는 답변이었다. 1970년대에는 강도에 인질로 잡혀 당시 돈으로 몸값 700만 마르크라는 거액을 지불하고 풀려난 적이 있었다. 그런데 인질범들은 당시 50대였던 이 거부를 인질로 잡았지만 그의 남루한 옷으로 보아 도저히 주인으로 인정할 수 없었다. 범인들은 그 자리에서 그의 신분증을 요구하고 비교한 후에야 납치해 갔다. 이쯤 되면 독일을 대표하는 갑부와 짠돌이의 이야기가 되겠지만 그가 후세에 보여준 교훈적 가치는 더 귀중한 것이다.
최근에는 독일의 이 두 업체가 프랑스와 영국에 진출하기 시작해 현지 기업들이 상당한 긴장하고 있다는 보도가 있다.
소비자를 위한 희소식으로 이어질 수 있을 것이다. 반대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유럽리포트*2015]
16. 국력을 과시하는 GDP
BIP (Bruttoinlandsprodukt 혹은 GDP)는 ‘국민총생산고’ 즉 한 국가의 모든 상품가치와 서비스 업무를 돈으로 환산한 국력의 지표이다. 모든 통계가 그렇듯이 국력의 계산에서도 나라마다 유리한 통계방법을 택하는 것이 일반적이라고 알려져 있다. EU도 이 점에 착안하여 글로벌한 기준에 맞춰 나가기로 했다. 이에 따라 9월부터는 마약판매나 담배밀수도 나라의 경제력에 포함된다. 담배판매와 담배밀수 사이에는 둘 다 소비자의 욕구를 충족시켜주는 행위이므로 같은 서비스업에 포함된다고 본다. 그러나 마약과 담배 밀수에서는 국내에서의 판매 수익만 경제력에 참작되며 수입가격은 포함되지 않는다는 규정이 있다. 섹스 산업 역시 EU에서 9월부터 총생산고에 포함된다. 그렇지만 독일에서는 성 매매가 이미 허용되어 있으므로 이미 국가 총생산고에 포함되어 있다. 섹스 산업계의 수익은 120만 명의 남성에 의해 연간 140억 유로에 달한다. 그렇지만 실제 국민 총생산고는 50% 정도에 지나지 않는데 각종 부담금이 연말정산에 포함되기 때문이다. 안전 및 포주비용, 방세, 의상, 콘돔비용 등이다. 이를 제하고 나면 한 번의 매춘행위가 국민 총생산고에 기여하는 가치는 30유로가 약간 넘게 계산된다. 그런데도 국민 총생산고가 1년에 3%가 증가한다는 것은 매우 높은 수치다. 이는 앞으로 기업의 연구개발비 (F + E : Forschung und Entwicklung)를 투자비용에 포함시키기 때문이다. 그뿐이 아니다. 앞으로는 군함, 탱크 혹은 로켓 등의 구입도 투자에 속한다. [유럽리포트*2014]
17. 동독 지역에 나치성향이 강한 이유
2015년 1월 독일에서는 1년에 3 만 명의 난민이 올것으로 예견했었다. 이 예측은 그간 몇 번 바뀌면서 10만, 30만, 80만 명을 넘어 이제는 연말까지 100 만 명의 난민이 몰릴것으로 예견한다. 예견이 빚나가듯 정부나 EU의 대책은 너무나 혼란스럽다.
8월 들어 독일에서는 난민수용 예정이던 숙소에 방화사건이 연이어 발생했다. 이를 규탄하는 모임을 갖는 시민단체도 있었지만 다른 한 편에서는 나치들의 반 외국인 데모가 계속되어 왔다. 단순한 데모가 아니라 난민수용시설에 대한 방화사건이 계속 이어진 것이다. 나치 데모대들은 경찰과도 대치하여 폭력시위를 벌렸다.
금년 들어 나치들의 폭력행위는 양적으로 그리고 질적으로 점차 도가 심해졌다. 금년들어만도 정치성을 띈 폭력행위는 전국적으로 300 건에 달한다. 경찰이 수세에 밀릴정도로 과격한 폭력도 잦아졌다.
이렇게 몇일이 지나면서 돌연히 동독 주정부장관들의 발표가 주목을 끌었다. 그 내용인즉 지금 독일에 일고 있는 반외국인 폭력이 동독지역에만 벌어지는 현상이 아니라는 것이다. 독일에서 가장 부유하다는 바이에른 주와 바덴뷔르템베르그 주에도 마찬가지가 아니냐는 지적이었다.
주 장관들이 이런 사회분석을 발표한 것은 전례없는 일이다. 이런 행동은 일종의 자격지심의 발현으로 보인다. 정량적인 분석없이 본다면 이들의 주장이 거짓이 아니다. 그간 드물게 나타나던 테러사건이 서독에서 가장 부유한 이 두 지방에서 증가한 것이다.
그러나 다른 각도에서 본다면 동독의 인구는 16% 인데 나치범죄율에서는 65%에 달한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여기서 당연히 동독지역에 나치 범행률이 매우 높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이 발표와 동시에 해석도 따랐다. 동독인들은 지난 80 여년 간을 철저한 독재정권하에서 살아왔다. 이로 인해 동독인은 지금도 변화에 대한 공포감에 시달리고 있다는 것이 주된 요인으로 지적되었다.
때를 같이 해서 베를린대학에서는 구 동독시대의 외국인 문제에 대한 연구보고가 있어 흥미를 끌었다.
이에 의하면 1980년대 1500 명의 월남인이 동독기업에 노무자로 왔는데 이들의 업무능률이 좋아 동독노동자들과 알력이 생길 지경이었다는 것이다. 동독기업은 태만하고 일의 능률에는 관심이 없는 분위기였다.
외국인들은 제대로 대접을 받지 못했다. 4×5 미터 방에 침대 4개 , 옷장, 세면대가 하나 있는 숙소였다. 그런데도 외국인에 대한 동독인들의 반감은 커졌고 시민들의 요구로 월남인의 숙소를 줄여야 할 정도였다. 게다가 동독정권이 멸망하기 2,3 년 전부터 월남인들은 컴퓨터 사업을 시작하고 월남에 수출도 했다.
개인적인 상행위를 혐오하던 동독정권에는 이들의 물욕, 영업행위에 대해 부정적으로 보는 시각이 컸으며 기생충같은 (parasitaere) 생활양식에 대해 (당시 동독에서 사용한 어휘) 동독인의 눈에는 가시로 보았다는 것이다. 국가선전에는 외국인이 ‚동무‘였지만 이유없이 혐오의 대상이 되었다.
동독비밀경찰 서류에는 동독에서 있었던 반 외국인, 반 유대인 사건이 기록되어 있었는데 놀랍게도 동독에 친 나치성향이 계속 유지되어 온데는 그 이유가 있었다.
그 뿌리를 보면 1947년 당시 소련 점령군은 군사 명령으로 나치범죄자에 대한 법적 청산작업을 중단하고 나치 장교 등 히틀러 밑에서 근무하던 요원들을 직접 동독 정권정당인 SED 당원으로 받아드린 것이다. 독재자 히틀러에 추종하던 중견간부들이 하루 아침에 공산당 간부로 탈바꿈을 했다. 지역에 따라 35%의 공산당원이 과거의 나치당원이었다고 한다.
이때부터 동독정권자에게 ‘나치란 서독에만 존재’ 한다는 통념은 일상적인 선전문구에 속했다. 그리고 동독에 그 많은 나치추종자들이 동독정권의 요원으로 봉사하고 있다는 사실은 끝까지 국가 일급 비밀사항으로 취급되어왔다.
즉 서독에서 오늘까지도 이어지고 있는 탈나치 운동은 동독에서는 아무도 접해본 적이 없다는 사실을 근본요인의 배경으로 보는 것이다. 동독지역에 친 나치층이 강하다는 것은 표면화 된 사실이지만 이 델리케이트한 문제를 서독측에서는 아무도 거론한 적이 없었다. 다행이 이번에 동독 정계 스스로가 이 문제를 쟁점화 한것이다. 앞으로 더 논란을 겪어야 할 사안이다.
역시 비밀경찰문서에 의하면 공산당중앙위원회 건물에는 1960년대 5년간에만도 30회에 걸쳐
친 나치 낙서사건이 있었으며 청소년들 사이에서는 학교, 공장 등에서 이런 사건이 자주 벌어졌다. 동독인이 서독인에 비해 훨씬 더 민족주의적 색채가 강하다는 내부문서도 있었다.
동독정권이 무너진 직후 사회주의 모범도시로 지정된 한 중소도시에서는 통일을 기뻐하기도 전에 반 외국인 테러가 발생했다. 폭력을 휘두르는 무리들에게 주위 시민들이 박수갈채를 보내는 살인사건이 벌어졌다. 전 세계를 경악감에 빠트렸다.
이때 동독수상이었던 호넥커는 ‘외국인에 대한 증오감은 독일인 멘탈리티에 박혀있다. 그러나 동독에서 이 문제는 극복되었다. 5월 노동절에는 세계 각국인과 피부색갈이 다른 국민들이 우애속에서 함께 행진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라는 말을 던진적이 있다. 현실감각을 상실하고 환상과 착각으로 쌓인 모습이다. 독재국가의 권력층에 흔히 나타나는 징후이다. [유럽리포트*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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